글 안 써지는 날, 쓰기 싫은 날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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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 써지는 날, 쓰기 싫은 날

2019.05.01

오래전에 정해진 마감 날이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한 줄 못 쓰고 있었습니다. 뭘 써야 독자님들께 기본 서비스라도 할 수 있을까, 오래도록 생각만 하다가  ‘글 안 써지는 날, 쓰기 싫은 날’, 이렇게 쳐 놓고 다시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봅니다.

쓸거리가 없는 게 아닙니다. ‘1분기 성장률 마이너스 0.3%’,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둘러싼 여야 극한대치’. 이 둘 중 하나만으로도 쓸 수 있고, 둘을 합해서 글 한 편에 몰아넣을 수도 있지요. 전자는 ‘소득 주도 성장 정책’과 ‘반기업 정서’, ‘정부는 시장을 못 이긴다’ 같은 개념과 문구를 잘 따져 정리하면 되고, 후자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나?’, ‘정파적 이해득실, 이제 그만 따져라’ 같은 말을 요령껏 순서를 잡아 써 내려 가면 됩니다. 둘을 묶어서 쓰려면 ‘정치가 이따위니 마이너스 성장이지’라는 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 겁니다.  SNS에서 읽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먼지인 세상’ 같은 삐딱한 말을 슬쩍 집어넣으면 약간의 쓴웃음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요.

글감이 있다면서? 그런데 왜 안 쓰냐? 비슷한 글을 하도 여러 번 썼더니 저 자신 신물이 나서지요. 같은 소리 자꾸 하는 거, 듣는 사람도 싫지만 하는 사람도 맥이 빠지는 겁니다.

“내년이 겁난다. 크게 망가져 있을 우리 모습이 두렵다. 인사들이나 제대로 하고 있을지, 밥술이나 제대로 뜨게 될지 걱정이다. 경제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계속 뒷걸음질이다. 성장률, 실업률, 수출, 가계부채 등등 모든 지표가 붉은색이다. 공포를 자아낸다. 희망의 푸른색은 없다. 푸른색 비슷한 것도 없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그 공포를 더 심화시키면서 경제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희망까지 삼켜버렸다. 1990년대 말 대한민국을 엄습했던, IMF 환란 때의 그 어려움이 되풀이될 것 같다는 불길한 전망이 어른거린다.” 2년 반 전 탄핵 정국 때 쓴 ‘알고도 당하는 경제위기’의 첫 줄입니다. 몇 글자만 바꾸면 지금 사회 분위기와 다를 게 전혀 없습니다.

‘정치적 리더십은 경제적 상상력’, ‘돈 벌어올 대통령 어디 없나’, ‘있는 먹거리라도 제대로 찾아먹자’ 같은 제목으로 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언컨대, 이 글들도 시점(時點)을 '현재'로 바꾸면 오늘 쓴 글로 믿을 분들 정말 많을 겁니다.

칼럼을, 특히 정치와 경제에 관해 정말 잘 쓰는 훌륭한 지식인과 뛰어난 언론인이 많은 것도 제가 시의(時宜)에 맞춤한 글을 덜 쓰려는 이유입니다. 2년, 3년 멀리 갈 것 없이 좀 이름 난 매체들  요 며칠 사이 지면을 살펴보면 날카롭고 적실한 칼럼들을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현실(현장)에서 찾아낸 풍부한 예증과 이론을 탄탄한 학술적 논리로 잘 버무린, 반론 제기가 결코 쉽지 않을 글들이 참 많습니다. 기껏해야 신문, 인터넷, SNS에서 들은 말로 그럴듯하니 뭘 만들어봤자 읽어보면 금방 차이가 드러납니다.

문제는 이런 글도 되풀이만 되고 있다는 것, 읽는 사람은 있어도 듣는 사람은 없다는 것, 너희는 떠들어라 우리에게는 우리의 길이 있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런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이 예전 광야의 예언자들처럼 아무리 옳고 바른 말로 이러면 안 된다고 소리 높여 외친들 누구 말대로 ‘바다에 쟁기질하기’밖에 안 됩니다. 헛일만 하고 있는 거지요.

글이 안 써져서, 글쓰기가 싫어서 좋은 글감 있으면 적당히 살 붙이고 늘인 후 내 글에 끼워 넣으려고 이것저것 메모해 둔 노트북을 뒤졌더니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 맨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줄이 눈에 꽂힙니다.

“역사는 장화를 신고 한 웅덩이에서 다른 웅덩이로 폴짝폴짝 뛰는 아이처럼 하나의 피바다에서 다른 피바다로 뛰어드는 행태를 보여 왔다. 물론 이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웅덩이에 너무 큰 관심을 둔 나머지 웅덩이들 사이에 있는 마른 땅은 잊고 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살 만큼 산 나이 든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 아이들이 지금 막 발을 내디디려는 곳에 또 다른 피웅덩이가 생겨날 것 같아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하라리 글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서건, 인류라고 하는 거대한 액체 덩어리 속에, 독성 강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냇물 줄기들이, 자기들 주위를 중독시키며 별도로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에 나옵니다. ‘소수의 독성 강한 사람들’이 피웅덩이를 만들어왔다는 것이겠지요.

그 다음 메모는 미국 작가 솔 벨로(1915~2005)의 1953년 작 ‘오기 마치의 모험’ 첫 줄, “누구나 알다시피 억압은 정밀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무언가를 누를 때는 그 옆에 있는 것들까지 함께 억누르기 마련이다”입니다. 소수의 독성 강한 사람들은 무엇을 누르는지도 모르면서 누르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위고의 글귀 뒤에 적어놓은 모양입니다. 그 아래에는 1963년 당시 베를린 장벽 앞에서 예전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말한 “자유는 쪼개질 수 없다(Freedom is indivisible!)”를 베껴놓았네요. "케네디는 더 짧은 말에 벨로의 생각을 담아냈다"는 유명 작가의 해석도 붙어 있습니다.

“제발 나는 누르지 마, 내 자유 쪼개지 마 !”
글쓰기 싫은 날이었는데, 쓰다 보니 이렇게 길게 늘어졌습니다. 쓰기는 싫어도 하고 싶은 말은 많은 날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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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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