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확보엔 일괄타결이 낫다 [임종건]


신뢰확보엔 일괄타결이 낫다 [임종건]

www.freecolumn.co.kr

신뢰확보엔 일괄타결이 낫다

2019.03.25

북미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남북 북미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졌다. 협상 상대가 북한이고, 의제가 북핵임을 상기한다면 일사천리식으로  갈 수만은  없다. 이번 결렬도 길게 보면 시작 단계에서의 샅바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핵화의지를 표명했을 때 나는 그가 체제수호를 위해 핵무기를 만든다던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과는 생각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가 젊은이답게  솔직하고 개방적인 시각으로 북한의 실정을 파악해, 핵을 갖고 있는 한 북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가졌기를 바랐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그런 기대 속에서 그와의 두 차례 정상회담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결렬 후 김정은이 한미 양국에 보이고 있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니,  그 역시 '김씨 왕조'의 3대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과 미국의 북한에 대한 불신은 해방 이후 74년의 단절로 비롯된 것이다. 그 불신은 거의가 무력도발과 약속위반을 일삼은 북한이 자초한 것이다. 그런 누적된 불신 속에서도 남북한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의 3차례를 포함, 5차례의 정상회담을 비롯해 많은 대화를 했다.

북미도 다양한 레벨에서 오랜 기간 핵협상을 벌였으나 작년과 올해 한 차례씩 가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의 두 차례 정상회담 역시 74년 만에 처음이었다. 미국과 외교관계가 이처럼 오래 단절된 나라는 지구상에서 북한이 유일하다.

북미회담의 핵심 의제인 북한 핵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와 관련, 미국은 일괄타결 방식을 제안했고, 북한은 단계적 타결 원칙에, 단계마다 상응하는 경제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북한의 이런 협상전략은 트럼프 대통령이 보낸 잘못된 신호의 책임도 있다. 트럼프는 작년 6월 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핵의 폐기보다 동결 방법도 수용할 수 있을 듯이 말해, 한일 두나라는 물론 미국 보수층들의 의구심을 샀다. 

그는 대선전에서부터 핵무기는 개발의지만 있으면 어느 나라든 가질 수 있는 무기가 됐다면서 북한의 핵보유에 대해 안일한 인식을 보였다.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나도 그것은 그들의 전쟁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는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해도,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월등한 성능의 핵우산으로 보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두 나라에 핵무기개발을 허용하면 된다는 말도 했다.

취임 후 북핵을 용납할 수 없다는 쪽으로 태도를 바꿔 북한을 당장 공격할 것처럼 말폭탄을 퍼붓다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 표명과 함께 급작스레 대화국면이 시작됐다. 그러나 트럼프의 심중에는 북의 핵보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심리가 여전히 잠재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도 트럼프의 그런 북핵 인식을 믿고 오판한 듯이 보인다. 영변핵시설을 폐기하면 최소한 한국의 문재인 정권이 미국과 국제사회에 요청해온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의 재개 정도는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하에 하노이 회담에 나섰다가 트럼프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영변핵시설 폐기+⍺’가 하노이 회담의 결렬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회담의 의제를 단계적 타결이 아닌 일괄타결 쪽으로 확실히 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 해법을 단계마다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새로운 난관이 조성되기 쉬운 나쁜 협상 방법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작은 제재의 해제라도 이뤄지면 전체 제재의 틀이 무너지는 위험성도 있다. 더 큰 위험성은 협상이 중도에 깨질 경우 핵폐기도 못하면서 북한에게 핵보유국 지위만 부여하는 결과가 된다는 점이다.

우라늄 농축시설 같은 보다 높은 단계의 핵시설 해체를 위한 협상을 해야 할 단계에서 북한이 내정간섭 등을 이유로 협상을 파기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1994년에 체결됐던 북미간 제네바 핵문제 합의가 2003년에 파기되는 과정이 그랬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김정은은 미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북핵 문제가 결국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의 문제라는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미국이 주장하는 일괄타결 방안에 대해서도 북한만 발가벗기는 불공정한 협상이라고 불평할 게 아니라 북한에 유리한 면도 있음을 살펴야 한다.

상대가 보여 달라고 하는 의심 시설들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전부를 보여주고, 그래도 의심나거든 찾아내라고 상대에게 공을 던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사실에 바탕한 제의를 할 경우 서로 신뢰를 확보하는 데 유용한 방법일 수 있다. 핵을 폐기할 의사가 확실하다면 그렇게 못할 이유도 없다.

또 하나 김정은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협상타결까지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수모를 각오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의심이 드는 곳이면 북한의 땅 밑을 모두 파보려 들 것이다. 나중에는 핵기술자들을 미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도 미국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대비해 비밀리에 핵개발을 하고 있던 1970년대 후반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협박과 수모를 견뎌내고, 핵을 포기하는 대신 주한 미군을 지켜냈다. 그런 시련을 이겨내야 김정은의 지도자 역량도 커진다.

북한이 일괄타결안을 수용할 경우 미국은 검증 절차를 되도록 빨리 진행해 대북제재를 신속하게 풀어 북한의 경제부흥을 도와야 한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쳐 ‘이밥에 고깃국’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한중일 경제 강국 사이에서 세계 최빈국으로 남아 있다.

북한은 핵무기로 체제를 수호한다지만, 남북한은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상대를 초토화할 수 있을 만큼 중무장한 상태다. 북한이 도발하지 않는 한 한미가 북한을 공격할 이유는 없다. 북한의 체제보장은 핵무기가 아니라 경제부흥으로 이루는 것이다.

하노이 회담결렬로 가장 난처해진 게 문재인 정부다. 북미 양국으로부터 불신을 사게 됐다. 그렇다고 여전히 북한의 단계적 해법을 지지해선 안 된다. 그것은 한미동맹을 위태롭게 하고 북핵 해결을 어렵게 할 뿐이다. 힘들더라도 일괄타결에도 잇점이 있음을 북에 설득해야 한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