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낚시 [한만수]


아버지와 낚시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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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낚시

2019.03.07

예전에 저수지 낚시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수지에서 잡히는 어종은 붕어나 잉어 피라미 따위입니다. 가끔은 메기가 올라오기도 하지만 고기를 낚겠다는 욕심보다는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소문난 낚시터보다는 조용하고 한적한 저수지를 찾아다녔습니다.

낚시를 그만 둔 것은 붕어를 방생(放生)하고 난 후부터입니다. 어느 날 밖에서 볼일을 보고 집에 가는데 아는 지인이 제법 씨알이 굵은 붕어 백여 마리를 내밀었습니다. 비료포대 안에 들어 있는 붕어는 하천 공사현장에서 잡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천 둑을 쌓으려고 물막이 공사를 했는데 물을 퍼내고 나니까 붕어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겁니다. 붕어 매운탕을 해 먹을 생각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갔습니다. 붕어를 본 아내가 반기기는커녕, 불쌍하니까 방생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아내 말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집 근처 냇가로 갔습니다. 보름이라서 달빛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습니다. 달빛을 받아서 은종이를 깔아 놓은 것처럼 흐르는 냇물에 붕어를 풀어 줬습니다.

냄비 안으로 직행할 뻔했던 붕어들은 저한테 감사의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잠깐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무리를 벗어나자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물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달빛은 교교히 흐르고 힘찬 생명력을 자랑하며 사라지는 붕어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넉넉해졌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낚시를 하지 않습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였습니다. 논에 심은 모들이 뿌리를 내리고 팽팽하게 줄기를 세울 무렵입니다. 밭에 심은 고추며 콩이나 들깨 같은 작물도 저 혼자 바람결에 몸을 맡기고 무럭무럭 자라는 한낮의 들판은 메뚜기까지 잠이 들 정도로 고요합니다.

매미가 악을 쓰며 울고 있고. 가끔 앞산에서 뻐꾸기가 추임새를 넣고 있는 동네도 조용합니다. 점심을 먹고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버지께 낚시를 같이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평소에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거나, 정겹게 시간을 보내는 편도 아닙니다. 불쑥 말을 꺼내고 이내 후회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당장 낚싯대를 사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대나무로 된 낚싯대를 사 들고 버스를 탔습니다. 10킬로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저수지 앞에서 내렸습니다. 음지에 습한 곳에서 지렁이를 잡아 들고 아버지와 나란히 물가에 앉았습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저수지 수면은 거울 같았습니다. 빨간색 찌는 수면에 못질을 해 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가끔 아버지를 바라보면 바쁠 것 없다는 표정으로 수면을 응시하고 계셨습니다. 수면을 바라보면 아버지와 제가 앉아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투영되고 있었습니다.

고기가 안 잡히니까 여름날의 오후는 고래심줄처럼 질기기만 했습니다. 어쩌다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치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맥없이 웃고 다시 수면에 떠 있는 찌를 바라봤습니다.

결국 그날 손가락 크기의 붕어 한 마리 잡은 걸로 만족하고 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 낚시는 끝이 났습니다. 이미 해는 서산에 허리를 걸치고 있고, 논둑이며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저수지 옆의 언덕길을 한참 내려가면 끄트머리에 주막이 있었습니다.

저수지 윗동네 사는 사람들이 언덕길을 올라가기 전에 목을 축이러 들어가거나, 저수지 아랫동네 사람들이 장날 장을 보고 동네로 들어가기 전에 한 잔씩 하는 주막은 간판도 없었습니다.
버스가 도착하려면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신작로가 마당인 주막에는 아버지가 아시는 분이 혼자 들마루에 걸터앉아서 막걸리를 따르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동네까지 온 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라 반기며 술잔을 권하셨습니다. 저는 주막 옆에 있는 고추밭 앞에 쪼그려 앉아서 버스가 올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끔 아버지와 친구분이 웃는 소리가 미지근한 바람결에 들려왔습니다.
“우리 아들과 낚시를 왔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구먼.”
“에이, 낚시를 하려면 션할 때 와야지. 날이 더우면 고기들도 낮잠을 자잖여.”
“그래도 우리 아들이 손가락만 한 붕어 한 마리 잡았다네.”
아버지는 친구분과 술을 드시면서 몇 번이나 저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더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이윽고 버스가 저 멀리서 노을을 등에 지고 언덕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를 바라보니까 주막 주인이 한 주전자를 더 들고나오셨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긴 여름날의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마당에 모깃불을 피울 무렵입니다. 집에 있던 가족들은 모두 저녁을 먹은 뒤였습니다.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하신 얼굴로 오늘 고기는 한 마리밖에 못 낚았지만 저 때문에 기분 좋은 하루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청소년 시절에는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려운 존재이셨고, 항상 가까이 계신 분인데도 자식들하고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의외로 감성적이시고, 대화하기도 즐겨 하시고, 자식들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이 많으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직장을 그만둔 후입니다.

그 시절에는 좋은 직장이라고 소문이 난 직장에 사표를 내고 소설을 쓰겠다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는 직장 문제는 언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넌 어렸을 때도 글을 잘 썼으니까 열심히 해 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형제들이며 친구들, 동네 사람들이 ‘저놈 제 정신인가? 하고 수상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전혀 다른 눈빛이셨습니다.

가끔 술과 안주를 사 들고 가며 아버지는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며, 혹은 돌아가신 친척분들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저와 시간을 보내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본 것은 채 2년이 안 됩니다. 막 아버지가 좋아지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무지개다리를 건너가셨습니다. 돌아가신 후에야 왜 좀 더 자주 대화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강물처럼 밀려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간다고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자식들과 얼굴을 마주 대고 웃으며 대화를 해 본 적이 2년은커녕 한 달도 되지 않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지시만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들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었음을 느낄 때마다 두려움이 앞장을 섭니다. 아들들이 제 나이가 되었을 때 그들 또한 저처럼 늘 말없이 서 있었던 저와의 대화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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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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