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삶의 출발 ‘갱년기’ [노경아]

새 삶의 출발 ‘갱년기’ [노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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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삶의 출발 ‘갱년기’

2019.02.25

과부 설움은 홀아비가 안다. 과부 설움은 과부가 안다. 과부 설움은 서방 잡아먹은 년이 안다. 과부의 심정은 홀아비가 알고 도적놈의 심보는 도적놈이 잘 안다.
남의 곤란한 처지는 직접 그 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음을 뜻하는 속담들입니다. 나이 들어 생기는 일들도 연배(年輩)가 같아야 이해할 수 있지요. 요즘 친구나 선배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갱년기’ 증상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이유입니다.

“나한테서 냄새 나? 걔(아내)가 영감 냄새 난다고 얼마나 구박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씻고 양치질하느라 힘들어 죽겠어. 잇몸이 닳아 없어질 판이야….”
5년여 연애 끝에 딸아이를 힘겹게 설득해 재혼한 면호 선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966년생, 쉰네 살 남자입니다.

“‘영계’ 타령하며 열네 살이나 어린 여자 만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 내 말대로 숙경(1967년생 이혼녀, 면호의 첫사랑)이랑 합쳐 서로 위로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아. 에잇 등신 같은 눔! 서긴 서냐? 걔가 그것 때문에 더 지랄하는 거여.”
입 걸기로 유명한 영진(1966년생 여자) 선배가 독설을 날립니다. 참 이상하게도 영진 선배가 하는 욕은 언제 들어도 싫지 않습니다. 누구를 향하든 애정이 담긴 욕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선배가 더 큰 소리로 또 한마디를 합니다.
“국경도 나이도 성별도 초월하는 사랑? 있지 있어. 그런데, 너흰 절대 아녀.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만 좋아하는 니들이 어떻게 그런 숭고한 사랑을 하겠냐. 하루라도 빨리 헤어져. 숙경이랑 합치는 것만이 너의 살길이여.”

선배들의 ‘티격태격’을 듣는데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여자만 좋아하는 60대 남자, 20년 연하남의 구애를 받은 50대 여자가 주인공입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수록 육체적 변화로 인한 ‘나이 듦’의 서글픔을 느낍니다. 젊고 매력적인 그녀, 열정과 힘이 넘쳐나는 그에겐 말할 수도, 말을 한다 해도 연인이 이해하지 못할 고민입니다. 결국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두 사람은 묘한 동질감에 빠져듭니다. 과부 사정 홀아비가 잘 아는 건 바다 건너 미국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 쉰 넘어서니 갱년기 증상이 하나둘씩 나타납니다. 노안(老眼)과 흰머리가 가장 먼저 찾아왔는데, 그때의 난감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요즘엔 하려던 말을 깜박 잊고, 늘 쓰던 단어가 입안에서 뱅뱅 돌아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친구들과 만나면 배우 이름 때문에 ‘스무고개’를 하기도 합니다.

남자는 갱년기가 없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 50대 이후의 남자라면 이미 스스로 느끼고 있을 겁니다. △체력과 정력이 예전만 못하다. △머리숱이 줄고, 배가 나오는 등 외모에 자신감이 떨어졌다. △쓸데없는 간섭이나 잔소리가 늘어 직장은 물론 집에서도 소외당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영화 ‘슈퍼맨’을 보다, 슈퍼맨이 하늘을 나는 장면에서 뜬금없이 눈물이 난다. 제가 지켜본 갱년기 남성(남편이라고 절대 못 밝히겠습니다)의 증상들입니다.

서울 강남 K정형외과 원장은 “대부분의 남자는 쉰 살 정도 되면 ‘안드로포즈(Andropause)’라는 갱년기 현상을 느낀다”며 “성욕이 감퇴되는 건 물론 상대적으로 여성호르몬이 늘어나 근육은 줄고 배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뼈가 약해져 골절 위험이 높아지고 피부가 건조해지며 목소리도 가늘어질 뿐만 아니라 쉽게 지치고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며 감성이 풍부해져 작은 일에도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며 “부부가 함께 좋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게 특효약”이라고 조언합니다.

그런데 주위를 살펴보면 굳이 옆지기가 없어도 갱년기를 힘겹게 보낸 후 그전보다 더 즐겁고 힘차게 생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술잔을 꺾어 마시며 ‘손목운동’·‘목운동’만 하더니, 전국의 명산을 오르며 체력을 기르는 사람, 잠 못 이루는 새벽 시간을 명상 혹은 고전·외국어 공부로 보내는 사람, 까칠함을 버리고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입니다. 삶 자체가 새롭게 바뀐 듯합니다.

갱년기(更年期)가 좋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한자 ‘更(갱)’은 ‘고치다’, ‘개선하다’, ‘다시’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새로워지다’라는 뜻도 품고 있습니다. 어쩌면 갱년기는 인생의 장애물을 넘어 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시기일 수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시기인 거죠. 너무 거창한가요?

삶을 다시 시작하는 시기가 갱년기라면 우리는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몸의 변화뿐 아니라 정신의 변화까지도 말입니다. 마구 먹던 음식을 조절하고, 바삐 사느라 돌보지 못한 몸과 마음을 챙겨야 합니다. “인생의 막바지요 낭떠러지라고 여겼던 절망의 끝이 실은 골목이 꺾이는 길모퉁이일 뿐”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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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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