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그토록 두려워한 세상/ '사회적 대타협' 迷妄에 빠진 정부


한국이 그토록 두려워한 세상

조중식 국제부장


한국 성공한 국제 질서 붕괴 중… 미국은 동북아에서 발 빼고 

뭍에서 이겨본 적 없는 중국, 해양서 월등한 일본 사이 끼어


    한 전문가가 얼마 전 '읽어보길 권한다'는 쪽지와 함께 책 한 권을 보내왔다.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원제 The Absent Superpower)라는 책이다. 2017년 1월 미국에서 출간됐고, 한국에는 지난 1월 29일 번역본이 나왔다. 2년 전 쓴 책인데 지금의 상황을 족집게처럼 전망한 것에 놀랐다. 


놀란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녁 자리에 동석한 한 사람이 이 책 이야기를 꺼내더니 "한국의 앞날이 걱정이다"라고 했다. 저자는 "지금 세계는 한국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미국이 손을 떼는 동북아에서 한국은 뭍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중국과, 바다에서 한국보다 월등히 뛰어난 일본 사이에 끼게 된다는 것이다.


책의 요지는 이렇다. 미국은 지금 스스로 구축한 세계 안전보장 체제와 자유무역 질서를 적극적으로 허물고 있다. 미국이 구축한 안보 체제는 구소련 견제와 중동에서 미국에 이르는 석유 수송로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동맹국들에 미국의 시장을 내주고 경제적으로 회유하는 자유무역 질서를 만들었다. 미국은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2010년대 중반 석유를 함유한 셰일층을 고압의 물과 모래로 파쇄해 석유를 뽑아내는 셰일 혁명에 성공해 에너지 자립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유무역 질서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있는 중국이다. 더 이상 일방적인 미국 시장 접근을 허용할 이유가 없다. 미국이 유럽·중동·동북아에서 발을 빼면 각 지역에서는 상당 기간 혼란이 불가피하다. 경쟁자들끼리 서로 갈등하며 혼란에 빠지는 것은 미국에도 유리하다. 책은 지역별 갈등과 혼란의 시나리오도 제시한다.


       


저자는 미 국무부를 거쳐 민간 정보기업 '스트랫포' 부사장을 지낸 지정학 전략가이자 안보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이다. 그가 전망한 대로 트럼프 취임 이후 미국은 유럽 동맹국들을 군사비와 무역 문제로 압박하며 나토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미군을 빼기 시작했다. 미 하원 법사위는 지난 7일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담합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OPEC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일본·유럽 등 동맹에도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며 자유무역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런 변화를 지켜보며 지난 16일 "이제 우리는 갈라서야 하는가, 모든 나라는 각자에 최선인 것을 찾아야 하는 시기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고 했다.


문제는 미국이 허물고 있는 기존 국제 질서는 지난 70년간 한국의 성공을 가능케 만든 환경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미국이 보장하는 안보 체제 속에서 자유무역의 수혜를 최대한 누리면서 세계 9대 무역국, 세계 11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미국 전문가들조차 오는 27~28일 베트남에서 열리는 2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북핵 동결과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역량 제거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 미국의 안전만 확보하고 한국의 안보, 동북아 분쟁과 갈등에선 손을 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갖고 있는 자산마저 내다버리고 있다. 중동에서 가장 먼, 세계 석유 공급망의 끄트머리에 있으면서도 탈원전을 내세우며 석유 자원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에너지 정책을 고집한다. 일본과의 관계는 미국이 빠지면 회복 불능일 상황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다가가는 상대는 핵을 들고 위협하는 북한 정도다.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새 국제 질서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인가

조중식 국제부장 조선일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4/2019022401642.html



'사회적 대타협' 迷妄에 빠진 정부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탄력근로 기간 6개월로 연장키로 
이미 3년 전에도 합의했던 내용 

이해 갈리는 개혁 과제들인데 대타협 기다린다며 책임 회피


     지난 수요일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6개월로 늘리는 데 노사정이 전격 합의했다는 소식이 가뭄의 단비 같은 대접을 받으며 보도됐다. 합의가 물건너갔다는 비관이 전날 퍼졌던 터라 더 극적이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경사노위) 위원장은 "우리나라 사회적 대화에서 처음이고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며, 청와대는 "우리 사회가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정표"라며 높이 평했다. 한편에서는 '야합'이라 비난하는 민노총과 "반대만으로 개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다"는 한노총의 대립이 긴장감을 더했다.

자화자찬이 주를 이루긴 했지만 드라마 한 편임에는 틀림없다. 딱 한 가지, 탄력근로 단위 기간을 6개월로 하는 것에 불과 3년 전 노사정이 이미 합의하고 팡파르를 울렸다는 점을 덮는다면 말이다. 경사노위 홈페이지에 떡하니 오른 2015년 9·15 사회적 대타협 합의문 13쪽 내용이다. 1년여에 걸친 논의와 합의, 합의 이행과 한노총의 파기 등 지난한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금 청와대와 고용노동부에 수두룩하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은 바로 노사정이 진통을 겪어 합의에 이른 뒤 대타협 달성이라 전 세계에 자랑하고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과거 합의는 없던 것으로 치는 것이다.



이러면서까지 금번 합의의 의미를 확대하는 것은 앞으로 국민연금을 비롯한 많은 현안을 노사 타협을 거치도록 하고 이에 힘을 싣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이렇게 대타협에 집착하는 것은 왜일까. 박근혜 전 대통령도 사회적 대타협을 주요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걸 보면 이에 관한 한 진보나 보수나 차이가 없다.

우선은 각계가 합의했다는 협치의 모양새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겹 들어가보면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둔감함과 허영심, 책임 회피의 버무림일 뿐이다. 전례 없던 글로벌 호황이 끝난 1980년대 이후의 핵심적 변화는 좋은 일자리가 줄고 노동시장에서 번듯한 자리를 못잡는 소외층 비중이 늘면서 핵심 근로자 조직이 더 이상 진보 세력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 세력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등 근로자 간 격차가 벌어지고 근로자와 실업자 간 이해가 부딪치는데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국가적 차원 문제에 기득권 근로자 조직이 강한 발언권을 갖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게 된 것이다.

독일이나 스웨덴처럼 근로자 조직이 오랜 세월 국가 전체에 대해 정부와 의논해온 전통이 있는 경우 조금 낫지만 이런 국가조차 근로자 조직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대신 국가가 적극 나서 국민 전체를 위한 길을 찾아 제도를 개혁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처럼 대기업과 공공 부문의 정규직 이해만 대변하는 양 노총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시대 변화에 눈감으니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모양새에만 집착하며 정작 사회적 양극화나 기술 변화, 노동시장 개혁 등 정부가 전력을 기울여 방향을 제시해야 할 책임은 방기한다. 얼마 전 이재웅 쏘카 대표가 "수십만 택시 기사만 있는 게 아니라 수천만 택시 이용자가 있는데 이들을 뺀 이해 당사자만 모아놓고 무슨 대타협을 기다리는 거냐"고 일갈한 것은 핵심을 정확히 찔렀다.

둘째, 정권들이 사회적 합의에 참여해달라며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노조의 위상과 지분을 드높여 온 것이 그간의 역사이지만 지금 정부는 모양새 욕심뿐 아니라 노동계와 같은 편이라는 의식도 유독 강하다. 절차를 뒤집어가며 판을 만들어주고 성과를 과장해 띄워주는 것은 과하다. 탄력근로제는 국회에서 처리하기로 여야가 이미 합의한 사안이다. 3년 전 노사 합의 내용을 참고하든 진일보시키든 국회에서 처리해야 했다. 애초 52시간 근로제와 함께 처리해야 했던 사안인 만큼 최대한 달라붙어 입법 처리해야 했던 문제를 대타협을 이루겠다며 경사노위로 되돌려보낸 것이다. 결국 선명성으로 인기몰이 중인 민노총이나, 정부와 협력해 실리를 추구하는 조직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한노총 모두 무언가를 챙겼지만, 이 과정의 왜곡과 시간 낭비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사회적 대화와 사회적 타협은 다르다. 노사가 만나 이해 폭을 넓히고 사회에 의제를 제기하는 사회적 대화의 역할은 너무나 소중하다. 인내심 있게 정성껏 그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러나 국가 전체를 볼 역량도 의지도 아직 없는 이들에게 국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긴박한 현안에 대해 타협을 강요하고 결정을 맡기는 것은 사회적 대화의 성숙에도 국민에게도 백해무익이다.
조선일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4/20190224016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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