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 학생들의 귀성 비행기 [김수종]

국제학교 학생들의 귀성 비행기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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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학교 학생들의 귀성 비행기

2019.02.11

설을 앞둔 지난 1일 제주에서 김포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시간이 늦어 허겁지겁 탑승하는 바람에 자리 찾기에 급급해서 비행기 객실 분위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출발할 즈음에 숨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 큰 보잉777 비행기 좌석이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로 가득했습니다.
처음엔 “겨울방학 중인데 웬 수학여행 학생들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수학여행 학생들은 희희낙락하며 시끄러운 법인데, 이 학생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자기네들끼리도 떠드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근처에 앉은 여학생의 교복에 새겨진 학교 로고를 보고서야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학교 학생들이 아니라, 제주도 영어교육도시에 있는 국제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설을 맞아 서울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를 탄 것입니다. 한 학생에게 물어보니 1월 중순 겨울방학이 끝나고 이미 학교를 다니다가 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 귀성객인 셈입니다.

제주도에 국제학교가 서너 개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국제학교 학생들이 '서울 귀성' 비행기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은 충격이었습니다. 소문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때 놀라움 같은 것입니다. 학생들 틈에 그들의 어머니일 듯싶은 여성들이 듬성듬성 보였습니다. “딸이 방학을 맞아 서울로 귀성하게 되니 제주까지 마중 나간 요즘 엄마들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학생들이 우르르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도란도란 얘기하며 터미널을 빠져나오는 그들 모습이 하교 길 학생들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공항전철 역으로 걸어가며 멋대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강남 학생들이 많을 테니 9호선 지하철이 여고생들로 가득하겠구나.” 그러나 학생들이 비행기에서 내리면 공항지하철 역으로 갈 것이라는 내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지하철역에서는 비행기에서 내린 그 학생들을 한 사람도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얘들이 택시를 타고 집에 갈까, 아니면 제주도에 유학 보낸 부모들이 설날 돌아오는 딸들을 데리러 차를 몰고 공항까지 마중 나왔을까.
그날 비행기를 채운 국제학교 학생들의 모습, 그리고 지하철역에서 그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은 허전한 충격이었습니다. 학생은 으레 지하철이나 시내버스를 타야 한다는 케케묵은 내 인식이 허물어져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생각은 그랬습니다.
이튿날 제주도의 한 국제학교에서 일했던 젊은 친지에게 비행기에서 보았던 광경을 얘기해주며 내가 느꼈던 기분을 전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잘 모르시는구나. 학생들이 방학에만 올라가는 게 아니라 주말에도 많이 서울 집으로 가요. 그리고 엄마가 제주도로 아이들 데리러 오는 게 아니라 영어교육도시에 아예 집 장만하고 살다가 방학하면 같이 서울 가는 거예요. 기러기 아빠 굉장히 많아요. 시골에 있는 영어도시 아파트값이 얼마나 비싼데요.”
국제학교 학생들을 본 이삼일 후 친구 몇 사람이 근교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카페에 들렀습니다. 국제학교 얘기를 화제에 올렸습니다. 나이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카페의 여주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국제학교 연간 학비가 5천만 원이라는데, 경제적 사정이 허락한다면 딸을 그리 보내겠습니까?” 얘기를 흥미있게 듣던 카페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제 딸은 대학을 나왔거든요. 만약 중 고등학교에 갈 딸이 있고, 그 아이가 절실히 원한다면 국제학교로 보낼 수 있어요. 본인이 원한다면요.”    
국제학교 얘기가 튀어 영어 교육 얘기로 번졌습니다. 친구 중 한 사람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외손주 영어 과외에 월 2백~3백만 원을 쓴다고 딸을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어 과외에 3백만 원,  놀라운 얘기였습니다. 국제학교 학비 5천만 원과 영어 과외비 3천여만 원이 대비되며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나중에 외고 출신 대학 4학년생에게 "3백만원 영어 과외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학생은 처음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영어 과외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들만의 세상이 있으니까요."
국제학교라면 마음속으로 ‘헬조선’을 읊조리는 아주 특수한 부잣집 아들딸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어쩌면  편협한 소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국제학교의 기숙사 시스템이 더불어 살아가는 커뮤니티 시민을 기르는 좋은 훈련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학부모가 국제학교 근처로 몰려가 자녀와 같이 살며 뒷바라지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강남형 교육열이 제주도까지 연장되는 것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영미식 학교와 강남식 학부모 사이에서 배출되는 제주 영어교육도시 학생들의 미래 모습이 궁금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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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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