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 반드시 가겠다”니 [김홍묵]

“못 가본 길 반드시 가겠다”니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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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 반드시 가겠다”니

2019.02.08

새해 들면서 ‘최초’ ‘최대’ ‘최저’ ‘최악’ ‘처음’ 같은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사법 사상 최초로 전직 대법원장(양승태) 구속
-서울 강남 아파트값 6년 만에 최대 하락
-최저임금 급등이 부른 사상 최대 불법체류자…작년 35만 명 돌파
-산업생산 증가율 1%…1970년 집계 이후 역대 최저
-설비투자 증가율 -4.2%…2009년 이후 9년 만에 최악
-24兆 쓰고 고용참사…금융위기 후 10만 명 아래 첫 추락
-개성사무소 들어간 南석유 UN 제재위반…한국에 처음 지적
-‘유공자’ 6번 탈락한 손혜원 부친, 제도 바뀐 후 첫 수혜
-고검 부장검사, 검찰 역사상 첫 음주 삼진아웃

즐겁고 풍성하고 희망 가득한 설 명절이어야 하는데도 긴 연휴를 보내고 난 뒤끝은 씁쓸하고 허전하고 불안합니다. 왜일까요? 연초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경제, 못 가본 길 반드시 가겠다”고 한 선언의 불투명성 때문입니다. 신년 인사회에서 이같이 밝힌 그는 이어 “경제정책의 큰 틀을 바꾸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가보지 못한 길이어서 불안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대화와 타협, 양보와 고통 분담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정책 기조는 고수하되 반대론자와 국민에게는 양보와 승복을 강조했습니다. 못 가본 길의 끝,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 목적지 알 수 없는 가보지 않은 길
인간은 오늘 눈 뜨면서 할 일, 내일 나가서 할 일을 모르면 누구나 불안해집니다. 그 목표나 목적지가 타당하고 분명하면 대화·타협·양보도 하고 고통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엔 도처에 희망보다 불안이 널려 있습니다.
취업 소득 집값 전세 부채 금리 물가 학비 결혼 출산 유가(油價) 등은 생계와 직결된 불안입니다. 국가 안위와 국제적 위상이 걸린 외교 국방 북핵 동맹 정책도 예측을 할 수 없고 외세에 끌려다니는 듯해 미덥지 않습니다. 당장 결론 나지 않는 4대강 봇물 빼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까지 걱정을 더해 줍니다.

문제는 경제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터를 떠난 비자발적 이직자 수가 43만3,854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건설 분야(19만8,482명)가 가장 많았고, 숙박 및 요식업(4만9,757명) 도소매업(2만8,258명)이 뒤를 이었습니다. 통계청이 2010년 사업체 노동력조사를 집계한 이후 최대 수치라고 합니다.
배우자의 조건도 경제력이 중요 변수로 떠올랐습니다. 대한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20~44세 2,46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남자는 53%, 여자는 92.7%가 결혼 조건으로 경제능력을 앞세웠습니다. 집 장만 출산 교육의 관건이 경제라는 말입니다.

# 모든 불안의 원천은 경제인데
욕의 표현인 손가락 표시 V자를 승리(victory)의 상징으로 바꾼 처칠은 이런 유머로 뛰어난 정치 감각을 과시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 노동당의 창시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서 처칠은 “그건 콜럼버스야!”라고 단언했습니다. 참석자들이 어리둥절하자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출발할 때 어디를 가는지 몰랐고, 도착하고서도 거기가 어딘지를 몰랐어. 게다가 모두 남의 돈으로만 했거든.”
남의 돈(세금)으로 평등과 복지정치를 구현하려는 노동당 정책에 대한 신랄한 은유입니다.

18~19세기 유럽의 공상사회주의자들은 실제로 평등과 복지가 보장된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면직공장을 운영했던 오웬(Robert Owen, 1771~1858)은 미국 인디애나 주에 새로운 화합(New Harmony)을, 프랑스 상인 출신인 푸리에(Fourier,1772~1837)는 역시 미국에 29개의 이상적인 소규모 공동체 팔랑크스(phalnxes)를 세웠습니다. 특히 1840년대 1,600명 규모의 팔랑크스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자리를 선택하고, 자녀 양육을 위해 가정은 유지하되 상대방을 바꿔 성욕을 채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공동체는 모두 곧 사라졌습니다. 학자들의 공상은 유토피아가 아닌 신기루일 뿐이었습니다.

# 투명한 미래가 화합의 관건
문 대통령의 가보지 못한 길의 종착역에도 분명 뭔가는 있을 법합니다. 하지만 어떤 세상인지, 얼마나 걸릴지,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 궁금하고 불확실하면 사람들은 냉소적 반응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대통령을 비꼬는 태양왕 경제왕 고용왕 기부왕 외교왕 같은 표현입니다. 전국 100여 개 대학에 나붙은 대자보에 실린 내용들입니다.
SNS에 떠도는 지난 1일의 대통령 ‘도시락 배달 쇼’는 차라리 팩트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경호 인력 500명/ 반경 500미터 이동통신 차단/ 주변 교통통제 주민 출입 제한하며/ 달랑 도시락 7개 날랐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어서입니다.

사람마다 기질이 있습니다. 오기(傲氣) 객기(客氣) 요기(妖氣) 음기(陰氣)의 기질을 가진 사람은 타협과 양보와 거리가 멉니다. 반면 화기(和氣) 향기(香氣) 총기(聰氣) 용기(勇氣) 서기(瑞氣) 예기(銳氣) 생기(生氣) 숙기(淑氣) 정기(正氣) 어린 사람은 화합과 창조를 이끌어 갑니다. 사람마다 좋은 기질을 발양할 수 있는 투명하고 보편적인 미래 설계가 필요합니다.
대항해시대처럼 미지의 세상이 있지도 않은 지구촌시대에 조국(祖國) 아닌 ‘조국(曺國)을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외치거나, 불만만 하지 말고 동남아로 가라고 국민을 떠밀면 불안은 더욱 증폭될 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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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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