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와 추사를 생각하며 [임철순]


수선화와 추사를 생각하며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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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와 추사를 생각하며

2019.02.01

매년 1월 한 달 동안 열리는 제주 한림공원의 수선화축제가 어제 끝났습니다. ‘겨우내 피어난 50만 금잔옥대(金盞玉臺, 쟁반에 놓인 금빛 술잔 같다는 뜻)의 합창’이라고 홍보해온 행사입니다. 제주 수선화를 그곳 사람들은 몰마농꽃이라고 부릅니다. 꽃이 크고(몰), 속 꽃잎이 마늘뿌리(마농)처럼 생겼다는 뜻이랍니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제주에서 나는 수선화는 추사가 처음 알았다”고 썼습니다. 1840년 54세 때 그곳에 귀양 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널리 알렸다는 뜻일 것입니다. 

추사는 맑고 고운 겨울꽃 수선화를 몹시 사랑해 몇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게 이 작품입니다.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一點冬心朶朶圓]/ 그윽하고 담담하고 냉철하고 빼어났네[品於幽澹冷雋邊]/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을 못 벗어나는데[梅高猶未離庭砌]/ 해탈한 신선을 맑은 물에서 정말로 보는구나[淸水眞看解脫仙]”  

그는 평생의 지기 이재(彛齋)권돈인(權敦仁, 1783~1859)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주 수선화는 산과 들, 밭두둑에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린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 없는 곳이 없을 만큼 피어나 천하에 큰 구경거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은 이 꽃이 귀한 줄 몰라 소나 말에게 먹이고 짓밟아 버리거나 호미로 파내곤 한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추사는 젊은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서 이 청순한 꽃을 처음 보고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 뒤 43세에 평양에 갔을 때 평안감사인 아버지가 중국에 다녀온 사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수선화를 달라고 졸라 남양주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보낸 일이 있습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다산은 “어린 손자는 처음 보는지라 부추 잎 같다 하고/ 어린 여종은 마늘 싹이 일찍 피었다고 놀란다”는 시를 썼습니다. 스물네 살 차이 나는 두 천재가 더 다양하고 길게 사귀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수선화는 동북아시아와 지중해의 연안에 자생하는 식물로, 우리나라의 남쪽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중부 이북에서는 월동이 어려워 오랫동안 시로만 언급되다가 조선 후기에 중국을 통해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완상물이 됐다고 합니다. 자하(紫霞)신위(申緯. 1769~1845)가 처음 들여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문인들은 북송의 시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이 읊은 대로 “수선화는 아우요, 매화는 형[山礬是弟 梅是兄]”이라거나 버선걸음으로 물 위를 사뿐사뿐 초생 달 따라가는 능파선자[凌波仙子]라는 형용(形容)을 즐겨 차용해왔습니다. 

추사는 천대받는 이 꽃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마구 내뽑히고 버려지는 수선화를 보며 하나의 사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런 딱한 일을 당한다면서 자신의 처지를 버림받은 수선화에 비유했습니다. “호미 끝에 버려진 이 흔한 물건을[鋤頭棄擲尋常物]/ 창 밝고 책상 조촐한 그 사이에 공양한다[供養窓明几淨間]”는 시 구절도 있습니다. 

이재에게 보낸 열네 번째 편지는 절절하고 참담합니다. “나 같은 소인은 하늘이 버린 바요 귀신이 꾸짖은 바이며, 해와 달이 비추지 않는 바이고, 비와 이슬이 적셔주지 않는 바로서, 온 누리에 농사일이 시작됐는데도 이 그늘진 곳에는 빙설(氷雪)이 여전히 쌓여 있습니다. (중략) 공중으로 뛰어오르려 해도 공중이 받아주지 않고, 땅에 박히려 해도 땅이 또한 뱉어내 버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넘어지고 거꾸러지며 나갈 곳을 모르겠습니다.” 

그런 추사와 수선화를 알리기 위해 제주 추사관은 ‘수선화부(水仙花賦)’라는 목판 탁본(23.5 x 60.8cm)을 추사의 작품이라고 전시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 의문이 생깁니다. 우선 수선화부는 추사가 지은 글이 아닙니다. 탁본에 대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청나라 문인 호경(胡敬)이 짓고 추사는 글씨만 썼다고 설명했고, 한양대 정민 교수는 ‘세설신어’라는 신문 연재 글에 추사의 글이라고 했다가 며칠 뒤 호경으로 정정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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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는 목판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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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본 중 방서 부분. '감옹'이라는 호가 씌어 있다.


그런데 개인 소장으로 알려진 서예작품 ‘수선화부(水僊花賦, 21.8×203.0,cm )’에는 “수금승지(壽琴承旨)가 수선화부를 지어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글이 매우 청려(淸麗)하기에 그대로 써서 보답한다. 근자 안질에 걸려 이처럼 졸필이니 꼴이 아니다. 완당”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수금승지가 누구인지 몰라 답답하지만 본문만 255자입니다. 추사관의 탁본은 앞부분 7행 42자에 불과하고 그나마 문장도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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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작품 '수선화부'의 마지막 부분.


더욱이 탁본의 끝에는 “조맹견(趙孟堅, 원나라 사람)이 쌍구(雙鉤)로 수선화를 그렸는데 지금 모지랑 붓으로 바꿔 되는 대로 그렸으나 법도는 한가지다.”라는 방서와 함께 감옹(憨翁)이라는 호가 씌어 있습니다. 감옹은 추사의 서화 제자이며 매화 그림으로 유명한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97~1866)입니다. 그는 석감(石憨), 철적(鐵笛), 호산(壺山), 감옹(敢翁 또는 憨翁) 등의 호도 썼던 사람입니다. https://blog.naver.com/yl1ca/80106657798 참고

두 작품은 글씨체도 서로 다릅니다. 같은 글자이긴 하지만 제목이 한 쪽은 水僊, 탁본은 水仙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걸 추사의 작품이라고 전시할 수 있을까요? 

“연못에 얼음 얼고 뜨락에 눈 쌓일 무렵/ 모든 화초가 말라도 너는 선화처럼 향기를 발산해/ 옥반의 정결을 펼치고/ 금옥의 아리따움을 간직한다. 꽃망울 노랗게 터지고 조밀한 잎 파릇이 피어나면/ 고운 바탕은 황금이 어리네/ 한 점의 겨울마음 늘어진 송이마다/ 동글동글 달렸고/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은 시리도록/ 빼어난 모습이네/ 매화가 고상하다지만 뜰의 섬돌을 못 벗어나는데/ 해탈한 신선을 맑은 물에서 정말로 보는구나.” 

이것도 추사의 시로 떠돌고 있는데, ‘연못에....어리네‘까지가 수선화부의 앞부분, 나머지는 추사의 시 두 가지를 짜깁기해 하나로 만든 얼치기 모작입니다. 

추사가 강조한 것은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송팔대가 중 하나인 한유(韓愈, 768~824)도 “무릇 만물은 평정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낸다”(送孟東野序·송맹동야서)고 했습니다. 잘못되거나 틀린 게 있으면 제자리로 바로잡아 평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꽃이 차례대로 핀다는 춘서(春序)는 이미 엉클어진 지 오래지만, 수선화의 경우 제주에 이어 3월 29일부터 4월 7일까지 전남 신안군 지도읍 선도 일원에서 ‘신안1004 수선화 축제’가 열리고, 4월 5일부터 5월 1일까지는 충남 태안에서 수선화축제가 벌어집니다. 봄과 꽃이 이렇게 차례로 북상하고 있습니다. 

수선화와 추사를 이야기하다 보니 세상일에 순서와 차례가 제대로 지켜지고, 틀린 것 없이 모든 게 제자리를 잡아 바르게 되고, 인재가 제자리에 서서 일함으로써 나라의 모든 이름이 바로잡히기를[正名]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이제 사흘 후면 입춘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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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한국기자상, 위암 장지연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1개월 인턴기자와 40년 저널리스트가 만나다(전자책)’,‘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마르지 않는 붓'(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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