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 젊은 날의 시간여행 [허영섭]

마니산, 젊은 날의 시간여행 [허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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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젊은 날의 시간여행

2019.01.30

전등사에서 마니산 쪽으로 이어진 길을 걷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시골길에 불과하겠으나 언젠가는 꼭 다시 걸어 보겠다며 마음속에 다지던 길이다. 주변 풍광이 유달리 아름답다거나 역사적인 유래를 지녀서가 아니다. 한밤중, 친구와 함께 아무런 생각도 없이 터덜터덜 걸었던 흙길의 아련한 기억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떠오르곤 했다. 방황하던 시절의 기억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선명해지는 법이런가. 그동안 강화도 나들길을 여러 차례나 순례했으면서도 이 길만큼은 일부러 남겨놓고 있었다. 젊은 날의 감흥을 되살리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고 여긴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어두운 밤이었다. 달빛도 숨어 버린다는 그믐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짙은 어둠 속에 주변 산등성이의 윤곽만 겨우 드러나고 있었을 뿐이다. 논밭이 이어지는 사이로 흘러나오는 마을의 불빛도 드문드문했다. 시외버스가 일찍 끊어진 탓에 서울 귀환을 포기한 채 마니산까지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야말로 무작정이었다. 왜 그토록 엉뚱한 충동이 일었는지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전등사 입구에서 들이킨 막걸리 몇 잔의 취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젊은 시절의 설익은 감정 때문이었을까. 더듬어 생각해보니 1981년, 아직 한창 시절의 기억이다.

지난 주말, 그때의 행로를 따라 나선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한편으로 긴장된 마음이 왜 없었을까. 동행하는 자명이도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38년 전 이 길을 함께 걸었던 바로 그 친구다. 지금껏 가끔씩 만나면서 술잔이라도 부딪치게 되면 마니산 밤길 얘기를 미뤄놓은 숙제처럼 떠올리다가 드디어 다시 그 길을 따라 걷기로 의견일치를 본 것이다. 더 늦췄다간 다시 때를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표현 그대로 과거로 거슬러 ‘시간 여행’에 나선 셈이다. 당시 밤길이 한낮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자동차 길을 따라가는 행로가 그때 걸었던 길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미리 염두에 둬야 했다.

비포장도로가 포장으로 바뀐 것부터가 달라진 모습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이 위치한 온수리 중심 지역을 벗어나면서부터 줄곧 흙길이었다는 기억이다. 울퉁불퉁 자갈도 밟히곤 했다. 자명이가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들었었기에 뚜렷이 생각이 난다. 형님이 며칠 전 사준 구두인데 돌부리에 채이다간 구두가 망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운동화를 벗고 양말까지 벗어 들었다. 나란히 걸으면서 혼자만 신발을 신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밤길의 충동이 맨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아마 맨발 행군이었기에 그때의 기억이 더욱 되살아나곤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도 발바닥이 심하게 까이지 않은 게 다행이다.

드디어 여우고개를 넘어서면서부터 저 멀리 마니산 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등사를 둘러본 다음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출발해 대략 한 시간 가까이 지났을 무렵이다. “청순한 어느 산골 아낙네가 저녁밥 짓는 모습을 여우가 핼끗핼끗 바라보며 지나갔다”는 옛 얘기를 나누며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겹겹 능선에 둘러쳐진 마니산 봉우리가 눈앞에 들어온 것이다. 여우고개라는 이름 자체를 이번에 알게 됐다. 도로 옆 이정표에 적혀 있는 이름이다. 그때도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이정표까지 일일이 확인할 여유까지는 없었으리라.

도로변의 마을들도 그동안 상당한 변화를 겪은 듯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을 감안하면 오히려 쇠락한 편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군데군데 새 주택들이 들어선 듯하면서도 느티나무 아래 동네 점방이 문을 닫은 모습에서 요즘 돌아가는 농촌 형편을 짐작하게 된다. 간판만 남은 정미소 문 앞에는 잡초더미가 얽혀 있다. 개천 얼음판에 만들어진 썰매장에도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펄럭이는 만국기의 깃발이 무색하기만 하다. 어둠에 가려졌던 밤길의 환상이 세월이 흐른 뒤 현실로 드러난 셈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몇 가지 궁금증은 여전하다. 길을 걷던 도중 대문이 열려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가 과년한 처자로부터 물 한 잔을 얻어 마셨는데, 그 집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 변했는지 흔적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 처자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마당에 우물이 있었고, 두레박으로 퍼올린 물을 건네받았다는 것은 자명이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무리 갈증 탓이라 해도 외지 사람으로서 남의 집 문을 두드린다는 게 염치불고의 처신이련만 아직 철부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는지 모른다. 인적 끊긴 야밤에, 더구나 아직 통행금지가 유지되고 있을 때의 얘기다.

그때 마니산까지 걷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네댓 시간 정도. 비포장에 맨발이었고, 한밤중이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두 시간 남짓 걸린 이번 행군과 거리가 거의 일치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때의 정확한 종착점을 찾지는 못했다. 화도면 마니산 등산로 입구 직전의 어느 지점일 것이라는 짐작에 그쳤을 뿐이다. 그 종착점에서 가파른 산길을 올라 어느 기도원에 들어가 잠시 마루 귀퉁이에 몸을 눕혔던 기억도 남아 있다. 새벽 기도회가 시작되면서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와 근처 신축 공사장에 쌓여 있던 모래를 덮고 선잠을 청했던 기억도 바로 어제 일인 듯 선명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 엉뚱한 처신이지만, 그렇다고 굳이 당시 사회상까지 끌어댈 생각은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들어간 뿌리깊은나무 잡지가 신군부 정권에 의해 폐간되는 등 정치·사회적으로 격변기에 처해 있을 때였다. 자명이도 검단 닭농장에서 관리 책임을 맡고 있었다. 검단까지 그를 만나러 갔다가 함께 무턱대고 강화도 구경에 나선 끝에 생긴 일이다. 다른 사람 누구에게라도 선뜻 권하거나 내세울 일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나는 아직 그 길가에서 맴돌고 있는데 어느새 40년 가까운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는 점이다. 다시 그 길을 걸으며 풋풋했던 시절의 자화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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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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