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릉 곁에 서서 [김영환]

선덕여왕릉 곁에 서서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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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 곁에 서서

2019.01.23

며칠 전 손녀 두 명을 데리고 경주를 여행했습니다. 앞으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신라의 역사에 대해 많이 배울 것이므로 미리 고적을 탐방하여 눈으로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비록 2시간 동안이었지만 KTX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즐겼던 무궁화 열차와 달리 아무런 시설이 없어 갑갑했습니다. 경주는 제 아버지의 고향이고 거기서 선조들이 활약했을 터이니 생각만 하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곳입니다.

대체로 예정된 코스대로 첫날은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을 보았습니다. 절제된 미를 자랑하는 석가탑과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는 다보탑을 보더니 미를 판단하는 기준이 제법 생겼는지 한 명은 다보탑이, 다른 한 명은 석가탑이 멋지다고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 길로 첨성대로 갔습니다. 

방학철인데도 관광객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호텔도 그렇고 유적지도 꽤 한산했습니다. 점심때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우리뿐이었죠. 불경기 때문일까, 초미세먼지 탓일까, 아니면 지진의 영향일까, 걱정되었습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열렸던 공원의 경주타워 전망대에 올라가 100만 명이 살았다는 경주의 너른 들판을 조망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3월에야 문을 연다고 하여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신라 금관이 출토된 천마총에서 손녀들은 금관이나 금 허리띠, 각종 금 장신구에 놀라는 모습이었습니다. 신라의 금은 어디서 왔을까 늘 궁금했는데 박홍국 위덕대 교수 겸 박물관장이 논문으로 의문을 밝혔습니다. 신라는 여러 하천에서 사금을 하루에 1킬로그램 정도 채집할 수 있었으며 그 풍부한 금으로 찬란한 황금의 나라를 발달시켰다는 것이죠. 

신라(기원전 57년∼935년)왕국이 1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것은 세계사에서 드문 일입니다. 하나의 국가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분명히 지속을 가능하게 한 시스템이 존재했을 터입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정신적인 기틀이 된 화랑 5계 정신이나 화백 제도가 그것이죠. 만장일치의 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리니까 나중에 이해시켜야겠죠.

돌아오던 날 경주시 보문동의 나지막한 낭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선덕여왕(재위: 632년∼647년)의 능을 참배했습니다. 왕릉이 화물 열차와 여객 열차가 잇달아 오가는 철로 변 큰길가에서 지척인 줄을 모르고, 길을 잘못 들어 논바닥으로 차가 넘어질 것 같은 좁은 논길을 아내가 내려서 보내주는 신호를 보면서 운전하여 겨우 찾아갔습니다. 

초대형 고분이 많은 경주에서 선덕여왕의 능은 조촐해 보였지만 그래도 둘레가 74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무덤 아래쪽의 둘레는 2~3단의 자연석으로 받쳐놓은 것이 특색이었습니다. 큰손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님이신데 무덤이 너무 수수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죠. “꾸미는 것만이 다 좋은 것은 아니야. 지금 선덕여왕의 이 무덤은 신라 시대를 나타내는 거야. 지금 이걸 꾸미면 신라 게 아니고 요새 것이 되는 거니까. 그대로 두는 것이 좋지.”라고요. 요즘 수백억 원을 들여 지붕을 덮은 청나라풍의 다리로 만들었다는 경주 월정교 복원에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여왕의 능으로 향하는 초입은 나무 계단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솔밭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오솔길을 약 20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갔습니다. 부왕인 진평왕의 승하 뒤에 성골의 남자로는 대가 끊기자 화백회의는 선왕의 맏딸 김덕만을 신라 27대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선덕여왕은 당과의 외교를 강화해 사절과 유학생을 보내 삼국통일을 준비한 왕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드라마에 보면 여왕은 외국어와 무술에 능하고 절벽에서도 뛰어내리는, 산전수전 다 겪는 캐릭터로 나옵니다만 당시의 사서가 부족하니 진실을 알 길이 없죠. 설총이 발명했다는 이두(吏讀)로 된 책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여왕은 천시에 밝아 분석력과 예지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자신이 몰(歿)할 것도 예언했답니다. “하늘을 알면 세상이 보일 것이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말 대로 별을 관측하여 농업에 이용하도록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국보 31호)를 세웠나 봅니다. 

선덕여왕은 여자는 군주로 부적절하다는 신하의 반란까지 일어난 와중에서 서거했습니다(647년 2월 17일, 음력 1월 8일). 지금 각종 고급 공무원이나 로스쿨 입학자 가운데 여성의 비중이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선 우리나라에는 1,400년 전에도 여왕이 있었다. ‘너희들도 야무진 꿈을 꾸거라.’ 라고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깨달았을까요? 하기야 영국의 메이,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현존하고, 우리나라에는 마이클 브린 같은 대표적인 외신 기자조차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탄핵 정변을 당해 쫓겨난 대통령이 있죠. 

경주 고적의 분위기에는 한복이 어울린다면서 한밤중에 치마, 저고리를 빌려달라고 떼를 쓴 손녀를 보며 경주는 지붕 없는 역사의 고향이 틀림없음을 느낍니다. 제법 추운 날씨에도 무덤과 안내표지만 있을 뿐인 선덕여왕을 찾아온 참배객과 더러 마주쳤습니다. 여왕릉을 방문하면서 보이지 않는 역사까지 사랑할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난 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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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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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선덕여왕 치세를 소개하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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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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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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