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적한 북한대사, 제2의 ‘강민철’ 되려나? [임종건]


잠적한 북한대사, 제2의 ‘강민철’ 되려나?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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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적한 북한대사, 제2의 ‘강민철’ 되려나?

2019.01.22

조성길 주 이탈리아 북한 대사대리가 작년 11월 초 이탈리아에서 가족과 함께 잠적한 후 석 달이 다되도록 종적이 오리무중이다. 그가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는 얘기와 함께, 이탈리아 또는 영국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예전 같았으면 정부가 나서 국내 송환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비치기라도 했을 터이나 이 사건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조 대사가 망명을 신청했다는 미국 쪽에서도 조용하기는 매한가지다.

북한의 대사급 고위 인사가 망명을 신청하면 한미 정보당국은 긴밀한 협조아래 먼저 망명자의 신변안전 조치를 취하고,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자유의사를 확인해서 그가 희망하는 나라로 망명할 수 있도록 했다.

망명자가 한국을 선택했더라도 미국 정보당국이 별도의 조사를 희망하면 그것을 허용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협조했다.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했을 때 그랬고, 영화감독 신상옥의 미국 망명 때는 그 반대의 경우였다.

조 대사대리의 잠적에 대한 한미정부의 달라진 태도는 작년 이후 달라진 남북관계, 북미관계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남북과 북미는 올 들어서도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 김정은 북한 노동당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를 통해 거듭 대화 의지를 표명했다.

특히 북미 간에는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지난 17일 2박3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을 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면담 후 기자회견에서 2월말께 2차 미북 정상회담 계획을 공표했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북미회담 후 김정은의 남한 답방이 이뤄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그것을 통해 남북의 경제협력 확대와 북한 비핵화의 진전을 기대하면서, 떨어지고 있는 국내 지지율을 끌어올리고자 한다.

조 대사대리의 잠적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다. 그가 망명지로 미국을 선택하든, 한국을 선택하든, 대화무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두 나라의 조 대사에 대한 망명 허용이 북한에 대한 적대행위라고 반발할 것은 불문가지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은 이같은 북한의 반발을 도외시하기 어렵다. 그것이 이 사건에 대해 두 나라가 침묵하고 있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나 영국 체류설은 두 나라가 망명허용 여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유보한 상태에서 잠정적으로 내린 조치일 가능성도 있다.

조 대사대리 잠적은 여러모로 보아 망명으로 간주돼야 할 사건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이 거부돼서는 안 될 사안이다. 그것은 그를 사지(死地)로 내모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의 망명을 막기 위해 북한이 필사적으로 취하게 될 보복행위를 감안할 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그의 신변안전이다.

이 점을 우려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2016년 한국으로 망명한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의 태영호 공사다. 그는 조 대사에게 공개편지를 보내 ‘조국’ 한국으로 오라고 권유하는가 하면, 한국정부에 대해서도 그를 데려오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서두르라고 촉구하고 있다. 태 공사의 외침이 똑같은 처지에서 망명한 북한 외교관 한 사람의 외침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조 대사의 경우를 보면서 떠오른 이름이 1983년 당시 버마(현 미얀마)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저지른 아웅산테러의 범인 강민철이다. 그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 수행원들을 사상케 한 아웅산 테러의 범인 3명 중 하나로,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돼 25년을 버마형무소에서 복역하다 2008년 55세 때 병사한 것으로 돼 있다.

그의 자백으로 아웅산 테러가 북한 소행임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자신은 죄를 뉘우치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는 죽기 전 한국에서 벌을 받고 한국에서 살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당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그의 국내 송환이 대북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부담을 느껴 송환을 허용치 않았다.

그가 죽던 무렵 아웅산 사건으로 단절됐던 북한-버마 외교관계가 재개됐다. 북한은 아웅산 악몽을 영구히 지우기 위해 유일한 증인인 강민철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그의 죽음을 아직도 일각에선 단순 병사가 아니라 북한 공작조에 의한 독살로 보는 배경이다.

조 대사가 태 공사와 달리 미국을 망명 희망국으로 선택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지금의 남북관계에서 한국으로의 망명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미국조차도 갈 수 없는 처지에서 한국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한다면 그의 운명이 어떤 위험에 놓일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이복형을 외국의 공항에까지 공작원을 보내 독살한 게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다.

북한의 비핵화는 한미가 협력해서 달성해야 할 중대한 과제다. 그렇다고 그것을 이유로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외면하는 것은 비핵화보다 더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를 외면하는 것이다. 조 대사가 제2의 강민철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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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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