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澗松 ), 수집가를 넘어선 ‘문화 독립운동가’ [이성낙]


간송(澗松 ), 수집가를 넘어선 ‘문화 독립운동가’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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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澗松 ), 수집가를 넘어선 ‘문화 독립운동가’

2019.01.17

올해는 삼일운동이 성난 불길처럼 온 나라에 번진 지 100년을 맞이한 뜻깊은 해입니다. 이 삼일운동을 기리는 행사의 하나로 재)간송미술문화재단(이사장 전영우)는 간송 특별전 <대한 콜랙숀>을 DDP(동대문역사문화관)에서 개최합니다.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이 귀한 문화재를 수집하며 겪었던 수많은 일화와 함께 전시 문화재를 살펴보는 것은 ‘삼일절 정신’을 되새기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번 특별전의 백미인 고려청자 매병이 우뚝 서 있습니다. 간송 선생께서는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이 13세기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 (高麗靑瓷象嵌雲鶴紋梅甁, 41.7cm, 입지름 6.1cm 밑지름 17.1cm 국보 제68호)을 1935년 당시 2만 원이란 거금을 주고 어렵사리 사들였다고 합니다.

다음 해인 1936년에는 경성미술구락부 전시에서 일본인과의 불꽃 튀는 경매 과정을 거쳐 소중한 백자(白瓷靑畵鐵彩銅彩草蟲蘭菊紋甁, 국보 제294호)를 1만4580원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1937년에는 도쿄에 거주하는 영국인 존 개스비 경(Sir John Gadsby)이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20여 년간 수집해온 고려청자를 일괄 넘겨받는 거사(擧事)가 이어집니다. 이때 간송 선생은 공주 일대의 5000석지기 전답 (최완수, 《간송평전 》)을 팔아 확보한 자금 [당시 화폐 가치로 50만 원 상당 (혜곡 최순우의 회고록 )]을 갖고 도쿄로 직접 건너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구매한 청자 중에는 1905년 을사늑약을 주도한 일본의 주한전권공사가 소장한 내력이 있는 청자(靑瓷母子猿形硯滴, 국보 제270호)도 있어 그 의미가 더욱 깊습니다. (사진 )

선생은 또한 조선 후기의 거장 현재 심사정 (玄齋 沈師正, 1707~1769)의 폭 58cm, 길이 8m 넘는 대작 ‘촉잔도권(蜀棧圖卷)’을 거금 5000원에 구입한 다음 일본으로 보내 6000원을 들여 표구를 새로 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에 결국 1만1천원의 거금을 지불 한 셈입니다.

이처럼 선생께서는 이미 해외로 넘어간 미술품을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고가 미술품 수집상은 불상 ·석상 ·서화 ·도자기 중 한 장르(Genre) 중심, 또는 시대적 구분을 갖고 작품을 물색하는 경향이 뚜렷한데 간송 선생은 우리 문화재라면 가리지 않고 우선 구입하여 확보·수장한 것입니다. 그만큼 수집의 폭이 넓었다는 뜻입니다.

그 전형적인 예로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를 들 수 있습니다. 1940년 여름, 선생은 한 거간에게서 ‘훈민정음원본’이 경상도 지방에 나타났는데, 그걸 구입하려면 1000원은 족히 들 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에 선생은 바로

1만1000원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1만원은 ‘훈민정음해례’ 구입대금이고, 1000원은 ‘수고비’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당시 1000원은 큰 기와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큰돈이었습니다.

선생은 이렇게 확보한 ‘훈미정음원본’(국보 제70호)을 일제강점기 내내 숨겨서 무사히 간직했고, 6·25 전란 중에도 이 해례본만큼은 몸소 챙겼다고 합니다. 국보 지정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넘어, 만일 오늘 우리에게 훈민정음원본이 없다면 우리의 ‘한글 사랑’이 얼마나 무색한 일이겠습니까. 이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못해 소름이 돋기까지 합니다. 간송 선생의 민족적 쾌거를 경외로운 마음으로 되새기는 이유입니다.

간송 선생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든 비용은 ‘1935년 청자 2만원’, ‘1936년 백자 1만4580원’, ‘1937년 1만 마지기 공주땅 50만원’, ‘현재의 서화 1만1000원’, ‘1940년 훈민정음 1만1000원’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어간 현금을 합치면 총 55만6589원에 달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얼마나 큰 액수인지 환산해보려니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간송 선생의 높고도 숭고한 정신을 어찌 수치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문화 지킴이로서 선생의 위치는 어떤 수치도 뛰어넘을 만큼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간송 선생께 큰 결례가 될까 몹시 염려스럽더라도 선생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들어간 비용의 객관적 수치를 밝히는 것이 언젠가는 필요한 연구 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은행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1935년 대비 2017년 물가는 4,134,677배 상승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1935년도의 1만원은 2017년 현재 가치로 413억 4677만원에 해당합니다. 요컨대 당시의 55만6589원은 지금의 가치로 2조 3012억원이 된다는 얘깁니다. 실로 엄청난 거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선생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작품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거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선생이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앞서 언급한 고려청자를 일본 박물관에서나 겨우 감상했을 테니 선생이 어떻게 문화보국(文化保國 )을 했는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고려전>에 근래 소원한 한일 관계로 인해 일본이 소장한 고려청자를 보내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간송 선생이 지켜낸 ‘고려청자’의 소중함을 거듭 되새기게 되는 대목입니다. 자못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필자는 우리에게 ‘훈민정음원본’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 일본 경매장에 ‘원본’이 매물로 나왔다는 상상을 한 번 해봅니다. 물론 우리는 국가 차원에서 ‘1조 원’ 또는 더한 금액을 들여서라도 이를 구입·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간송 선생의 수장품은 우리 모두에게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필자는 삼일절 100주년에 즈음해 간송 전형필 선생을 ‘문화 독립운동가’로 우리 모두의 마음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총칼을 들지 아니했으나 국내외에서 우리 문화재를 수호함으로써 우리의 민족혼을 면면히 이어왔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글 ‘문화 독립운동가 전형필 ’,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김동길 , 기파랑 , 2017)과 부분적으로 겹친다는 점을 밝혀둔다.

사진 설명 :

사진 왼쪽부터
1935년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高麗靑瓷象嵌雲鶴紋梅甁 , 국보 제68호 )
1936년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란국문병(白瓷靑華鐵彩銅彩草蟲蘭菊紋甁 , 국보 제294호 )
1937 년 청자모자원형연적 (靑瓷母子猿形硯滴 , 국보 제270호 )
간송 선생이 수집한 문화재 3점이 나란히 보인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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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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