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 올레 18코스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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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제주 올레 18코스

2019.01.14

지난 12월 말 제주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동행한 친구도, 나와 마찬가지로 고단해진 심신을 바닷가를 걸으며 달래보자는 생각에서 나섰습니다. 요즘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밤이 많아졌습니다. 걷는 게 아니면 할 일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서 잠을 푹 자고 싶은 마음도 더해졌습니다. 젊었을 때 하루 커피  열 잔을 마시고도 잘 들던 잠이 요즘은 오후에 드는 카페라테 한 잔에도 도망가 버립니다.

하루 걸러 두 코스를 걸었습니다. 첫 날은 제주항 근처에 오뚝 솟은 사라봉에서 조천 포구까지 이어지는 제주 올레 18코스를 따라 걸었습니다. 5시간에 걸쳐 약 18㎞를 걸었습니다.

섭씨 0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에 설한풍이 몰아쳤습니다. 제주도에 매우 드문 겨울 날씨였습니다. 가만히 서 있으면 한기가 두툼한 등산복 틈새로 스며들었습니다. 추위를 피하는 방법은 느릿느릿이라도 계속 걷는 일이었습니다. 

겨울 바다가 황량했습니다. 배가 모두 포구에 정박해 버린 빈 바다는 쉴 틈도 없이 파도를 말아 올렸다가 새까만 바위에 부딪치면서 하얀 포말을 하늘로 내뿜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아일랜드에서 보았던 쓸쓸한 해변이 생각났습니다.

준비해 간 김밥을 몰아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닷가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김밥을 같이 먹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서너 곳서 거

닭머르 해안길

절당했습니다. 파도는 그대로인데 옛날 갯마을 인심은 수없이 생겨나는 카페와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다행히 어느 바닷가 카페 매니저가 양해를 해줘서 커피를 반찬 삼아 김밥으로 요기했습니다. 그 카페 매니저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카페에 머무는 시간을 제외하고 새까만 현무암 해안선을 따라 걸었습니다. 제주가 고향인 나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곳인데 바닷가를 따라 돌담길, 모랫길, 징검다리길, 동네 골목을 걸으니 아주 색다른 기분이 들었습니다.

스레이트지붕을 덮은 옛날 갯마을의 흔적은 더러 남아있지만, 골목마다 새로운 건물이 빼곡했습니다. 꽤 신경을 써서 설계한 건물도 있고, 대부분 콘크리트 범벅으로 만든 펜션이 바닷가에 즐비하게 늘어섰습니다. 

옛날 마을은 모두 바닷가에 용천수가 솟아나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수도가 설치된 지금은 용천수의 쓰임새가 달라진 듯합니다. 동네 용천 샘마다 그 유래를 설명하는 흥미로운 안내 팻말이 붙었습니다. 골목에 작은 카페가 있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도 문을 열었습니다.

아마 제주도 바닷가에 살기를 원했던 서울 사람이 어촌 집을 하나 구해 손님이 오든

어촌 올레길

말든 가게를 내고 조용히 사는 것이라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제주 올레 코스에는 정말 이런 식의 가게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제주 올레가 개통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제주도가 많이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올레길이 생긴 후 중국인 관광객이 회오리바람처럼 스쳐갔고 인구가 20%가 늘었다고 합니다. 올레길이 제주 섬을 바꾼 것인지 중국 붐이 올레길을 바꾼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천 포구의 연북정(戀北亭)에서 바닷길 걷기를 마감했습니다. 조천 포구는 조선시대 육지와 교류하던 제주도 제1항구였습니다. 연북정은 제주도의 전통 건축물들과 전혀 다른 건물입니다. 연북정을 보며 옛날 제주도와 현재 제주도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조선시대 축조된 연북정의 사연은 복잡하지만 건물 현판 ‘戀北亭’의 한자 해석은 ‘북을 그리워하는 정자’입니다. 북은 바로

연북정

임금이 사는 궁궐을 의미하니, 당시 제주 목사 등 목민관들이 한양에 있는 임금에 충성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입니다. 목민관들이 이곳에서 생각한 것은 임금을 향한 충성심보다는 하루빨리 임금님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 올라가서 좋은 벼슬을 얻는 것이었을 겁니다.

요즘은 조금 주춤했지만 제주도에 가서 여생을 보내거나 몇 년 살아보고 싶다는 대도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제 서울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연북정을 찾아서 바다건너 육지를 그리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바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면 되는 세상이 됐으니까요. 아무튼 연북정은 조선왕조 시대의 사고방식을 상징하는 흥미로운 유적입니다.

제주올레 18코스는 사람 사는 동네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옛사람들의 정취도 느낄 수 있는 길입니다.

해안길 18㎞를 걷고 나니 온몸이 쑤셨지만, 그날 밤 9시간을 곤하게 잔 것은 큰 소득이었습니다. ‘걸을 수 있을 때 자꾸 걷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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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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