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개업’ 1주일 [임철순]


 ‘백수 개업’ 1주일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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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개업’ 1주일

2019.01.07

44년 만에 언론계를 떠나 백수생활 개업한 지 1주일이 됐습니다. 1974년 어린 나이에 신문기자가 된 이후, 늘 긴장 속에 숨 가쁘게 살아왔는데, 그 세월이 참 빨리도 지나간 것 같습니다. 언제 이렇게 나이 먹고 늙었나, 기자로서 나는 언제 이렇게 낡아졌나 싶습니다.

이번 퇴직은 낡고 늙은 삶과 심신에 새로운 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쉽게 적응하기는 역시 쉽지 않습니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져 느긋해진 것 같고, 이것저것 즐거운 일 생각에 기분 좋다가도 ‘내가 이렇게 놀아도 되나’ 하며 초조해집니다.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일단 그렇다고 믿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자문하는데 자답은 얼른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은 굳이 내가 간여하지 않아도 잘도 굴러가고, 내가 지적질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남들에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버려.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해”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혼자 웃고 있습니다. ‘명함이 없는 삶’을 잘 꾸려가는 방법을 궁리 중입니다.

그러다가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박용철 ‘떠나가는 배’)며 주민자치센터에 두 가지 수강 등록을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하모니카입니다. 첫날 가보니 20명 정원에 여자 10명 남자 5명이 왔던데, 남자들 중에서 나는 완전 젊은이였습니다. 다들 시들어 활기가 없어 보이고 언동이 굼뜬 상노인들인 데다 하모니카를 부는 호흡도 처져 답답했습니다. ‘아니 내가 이런 사람들과 놀아야 되나? 괜히 기(氣)만 뺏기는 거 아냐?’ 하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런 말을 할 주제가 못 됩니다. 나는 자전거도 탈 줄 모르고 하모니카도 불어본 경험이 없습니다. 하모니카를 입에 대본 적은 있는데 어떻게 부는지는 이번에야 처음 알았습니다. 도는 불고, 레는 들이마시고, 미는 불고, 파는 들이마시고... 한심하게도 나는 이런 걸 전혀 몰랐습니다. 퉁소 단소는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서 틈틈이 불었지만 그런 게 없었거든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강사는 도레미파를 얼른 알 수 있게 학생들의 하모니카에 몇 가지 색의 스티커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에 나가자 “이건 씨키가 아니라 안 된다”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습니다. ‘씨키? 순자(강사의 이름)가 철순이한테 욕을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멍청하게 자리로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내 하모니카는 A키였고 필요한 건 C키였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찬찬히 설명을 해줘야지 거의 ‘시키’로 들리는 말만 자꾸 하면 어쩌라는 건지.

아내가 어디선가 찾아서 내준 그 하모니카는 품질보증 설명서로 미루어 내가 결혼한 1985년쯤에 생산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모니카의 주인일 법한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인데, 누가 어떤 계기로 그걸 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그래서 그날 C키 하모니카를 일금 5만 5,000원에 새로 장만했습니다.

첫날 배운 곡은 ‘솔솔라라솔솔미 솔솔미미레’ 이렇게 되는 ‘학교 종이 땡땡땡’입니다. ‘5566553 55332’이지요. 지난 목요일 이후 나는 시간 나는 대로(무슨 소리여? 항상 시간이 나면서!) 학교 종을 땡땡땡 치고 있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계명을 다시 읽게 됐습니다. 나도 계명으로 기억하는 노래가 몇 개는 있습니다. “라미레도시라미라솔시미 라미레도시미라도시미시”(슈베르트의 ‘노악사’), “도미솔도도 도시라솔 라시도솔라솔미솔 파미레도”(개천절 노래) 이런 것들.

하모니카를 불면서 음악에는 기본음 ‘도’가 중요하다는 것, 호흡이 음악은 물론 삶의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불고[呼] 들이마시는[吸] 것은 생명 유지활동의 전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호흡 간에 벌어지고 빚어지고, 순식간(瞬息間)에 생멸합니다. 순식간은 눈 한 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사이와 같이 짧은 시간입니다.

이 단어 중 식(息)이 바로 호흡인데, 참 재미있고 의미도 깊은 글자입니다. 息은 생존하다, 키우다, 번식하다 이런 뜻과 함께 쉬다, 그만두다, 그치다, 망하다 등 정반대되는 뜻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한 글자가 이처럼 상반되는 훈(訓)으로 풀이되는 경우 왠지 안심이 되고 참 고맙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글자가 알려주는 세상살이에서의 모순과 조화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순식간의 의미를 되새기다가 식견(息肩), 어깨를 쉬게 한다, 즉 ‘무거운 책임을 벗은 것을 이르는 말’과도 만났습니다. 활동과 휴식을 아울러 이르는 동식(動息)이라는 좋은 말도 알게 됐습니다. 살아가면서 동과 식의 조화를 잘 염두해 두어야겠다(순자 씨가 강의 중에 애용하는 말)는 다짐을 하면서 하모니카를 불어댑니다. 아직은 학교 종만 땡땡땡 치고 있는데 이번 주에는 “떴다 떴다 비행기”를 배울 것 같습니다. 뒷바람에 비행기가 뜨든 물이 들어와 배가 뜨든 뜨는 건 좋은 일이지요.

다시 息자로 돌아갑니다. 사서오경 중 하나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편에 “이러한 까닭에 군자는 배운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藏焉] 익히고 실천하며[修焉] 물러가 쉬면서 힘을 기르고[息焉] 놀면서 견문을 넓힌다.[游焉]”고 했습니다. 이른바 공부의 네 가지 양태인 장수식유(藏修息游)입니다. 공부할 때는 물론 놀 때나 쉴 때도 학문을 닦는 것을 항상 마음에 간직한다는 뜻이라지요? 쉬는 게 공부요 노는 게 학습이라니 하루 쉬고 하루 노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인가 봅니다. 호와 흡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음악을 알아가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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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한국기자상, 위암 장지연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1개월 인턴기자와 40년 저널리스트가 만나다(전자책)’,‘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마르지 않는 붓'(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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