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띠 해가 저문다] 경제 무대서 공식 퇴장… 그래도 다시 달린다

[개띠 해가 저문다] 경제 무대서 공식 퇴장… 그래도 다시 달린다


격동의 현대사 온몸으로 겪은 세대
76만명 중 올해 30만명 은퇴… 제2의 인생 찾아 고군분투

   2018년 개띠 해가 저문다. 올해 만 60세가 된 '58년 개띠'는 이제 경제 일선에서 공식 퇴장했다. 전쟁의 폐허에서 태어났으나 가난에 무릎 꿇지 않았고,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배우며 '산업 역군'으로 자랐다. 청바지 통기타의 낭만도 누릴 줄 알았지만, 군사 독재에 맞서는 결기도 있었다. 88올림픽을 지나며 마이 카 시대,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으나 불혹(不惑)에 날아든 IMF 외환 위기, 다시 10년 뒤 몰아친 금융 위기로 '구조조정' '명예퇴직' 당하는 첫 세대가 됐다. 빠듯한 살림에 늙은 부모를 부양했으나 정작 자신들은 자식의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세대이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모든 경제 활동을 중단하는 건 아니다. '58년 개띠'는 은퇴 후에도 다시 달린다.




올 초 택시 운전대를 잡은 58년생 정은호씨는 "나도 한때 목에 힘 좀 주고 다녔다"고 했다. 여상을 나온 누나가 공장 경리로 취업해 보내주는 학비로 경상도에서 서울로 유학해 중·고교를 다녔다. '장남'의 성공을 위해 온 가족이 뛰던 시절.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고, 중견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건설 경기 붐을 타고 해외시장도 누볐다. '대한민국의 반은 내가 지었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다. 1997년 외환 위기로 나이 마흔에 직장을 떠나기 전까지 말이다. "애들 학교는 보내야지, 돈 나올 데는 없지,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는 걸 그때 실감했어요." 아내는 식당으로, 자신은 주유소와 배달 일을 전전하며 몇 년을 악착같이 살았다. 예전 회사 동료의 소개로 중소기업 관리직을 맡았다가 지난해 퇴직했다. 아파트 경비직 자리를 구하려 지원서를 여러 번 쓰면서 경비 자리 얻기도 얼마나 치열한지 실감했다고 했다.




58년 개띠인 보험설계사 김도훈씨도 한때 잘나갔다. 고등학교 졸업 뒤 대기업에서 수출입 관련 영업을 담당했다. 중국 주재원으로 근무한 뒤 부장 직함을 달았다. 오십 중반, 갑자기 명예퇴직을 권고받았다. "명예가 없는데 무슨 명예퇴직인가, 씁쓸하게 웃었죠." 준비 없이 당한 일이라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대기업 부장까지 했는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3년 걸렸다. 늦둥이 학비 벌려고 대리 운전에 창고 관리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후배 소개로 고철 영업도 시작했다. "아직 힘이 있는데 적어도 10년은 일해야지요. 다만 '대기업 부장 아빠'가 아니니 저에 대한 자식들 기대치가 낮아진 게 느껴집니다. 쪼그라드는 기분이랄까…."


'58년 개띠'는 92만명이 태어나 현재 76만7100명(행정안전부)이 살아 있다. 이 중 약 30만명(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이 올해 은퇴했다. 은퇴가 곧 경제활동의 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통계청 고용조사에 따르면 올해 만 60세(4월 기준) 73만8000명 중 65.7%인 48만4800명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남성 기준으로 택시 기사 등 자동차 운전원이 11.4%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사무원(7.7%), 작물 재배 종사자(5.6%) 등의 순이었다. 상당수가 저임금 노동자다.



이들은 노후의 경제적 어려움만큼이나 은퇴 후 겪는 정서적 충격이 크다고 했다. 3년 전 은퇴한 58년생 한순호씨는 30년간 영화 마케팅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컨텐츠 마케팅 아카데미'를 열었다. 그는 "퇴직 후 정체성 상실이 더 힘들었다"며 "젊은 세대와 일자리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식대로 사회에 기여하며 존재 의미를 찾고 싶다"고 했다. 헤드헌팅 회사 '싱크탱크'의 이규선 대표는 "1983년 무역회사 입사 뒤 텔렉스·팩스·이메일·화상회의까지 모든 시대·기술 변화를 겪어낸 선발대"라고 소개했다. 그는 "풍요와 빈곤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세대로서 고용 불안의 젊은 인재에게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58년생 정과리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가난의 '출애굽기'를 이끌며 여느 세대보다 '할 수 있다'는 열망이 강했던 우리 세대가 축적된 삶의 노하우와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는 분야를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년학' 전문가인 서울대 한경혜 교수는 "건강한 중·고령층이 대규모로 쏟아져 나오는데도 기회 구조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서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들 자원을 사장시키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보윤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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