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매직과 한·베트남 관계의 미래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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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매직과 한·베트남 관계의 미래

2018.12.26

지난 12월 15일 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이 베트남 전국은 물론 많은 한국인까지 열광에 빠뜨렸습니다.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스즈키컵 축구대회 결승 2차전에서 베트남 팀이 말레이시아 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필자도 이날 밤 9시 반부터 지상파인 SBSTV와 케이블인 SBS스포츠TV가 동시 생중계한 이 경기를 시작부터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자정이 넘도록 모바일을 통해서 지켜봤습니다. 일본의 오토바이 제조업체인 스즈키 사가 후원하는 이 대회의 존재 사실도 이번에야 처음 알았습니다.

그처럼 알려지지 않은 대회를 국내의 지상파 TV가 편성을 바꿔가며 생중계한 것도 이례적인 데다, 두 TV 중계의 시청률 합계가 21.9%에 이르렀다니, 올 들어 국내에 들려오기 시작한 박 감독의 활약상에 국민의 관심이 컸음을 알았습니다.

필자 개인으로도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한국 팀 외에 다른 나라 팀을 한국 팀처럼 응원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기껏 북한이 일본 또는 중국과 하는 축구경기에서 북한을 응원한 적이 있으나 이번처럼 간절한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손흥민 선수의 소속팀이나 LPGA의 박인비 선수의 승리를 바라는 것과도 차원이 다른 열망이었습니다.

이번 승리로 박 감독은 베트남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성공한 사례는 많았지만 한 나라의 영웅으로 추앙될 만큼 성공한 사람은 아마도 그가 처음일 것 같습니다. 그의 성공이 더욱 빛나는 것은 한국에서였다면 이루기 어려운 성공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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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스즈키컵 결승전이 열린 하노이 미딩 경기장 응원석에 내걸린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치민의 대형 초상화가 박 감독에 대한 베트남 국민들의 추앙의 열기를 말해주고 있다.<사진 출처 = 뉴스1>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대회에서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맡았지만, 히딩크 감독의 명성에 가려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월드컵대회 이후 잠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성적 부진으로 밀려났고, 후배가 감독으로 있는 프로 축구단에서 다시 코치로 활동하다 그마저 그만뒀습니다.

그가 국내에 머물렀다면 한 누리꾼이 표현했듯이 ‘불쌍하게 생긴 중년’의 잊힌 축구 인생으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국내의 박항서 열광에선 불공평한 시스템으로 인해 실패자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리만족 현상도 느껴지고, 그들이 대한축구협회의 무능이나 파벌주의에 대한 비판을 곁들이는 이유도 짐작이 갔습니다.

박항서 매직이 절묘한 것은 그가 제2의 축구 인생 개척지로 베트남을 선택한 것 자체라고 봅니다. 베트남은 지리적, 역사적으로 우리와 다른 점보다 닮은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 두 나라는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았고, 무엇보다 동족상잔을 겪었습니다.

두 나라 국민은 지형부터 반도 국가 탓인지 기질적으로 닮은 점이 많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강하고 불의에 대한 저항심이 강합니다. 박 감독은 감독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자존심은 강하나 자신감이 없는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세계 유일의 나라이고, 베트남은 미국 중국 프랑스 등 3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과 전쟁을 해서 승리한 나라입니다. 그런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한 두 나라는 이웃과 불화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두 나라 국민이 중국과 일본을 싫어하는 공통점은 이런 역사적 기질적 배경에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은 월남전에 참전함으로써 베트남과 특별한 관계가 됐습니다. 지금은 경제교류에 묻혀 잊힌 듯하지만 언제든 폭발의 잠재력이 큰 역사의 상처입니다. 많은 한국인이 이 사실을 되새기며 박항서 매직으로 베트남에 진 빚이 덜어졌기를 희망한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두 나라는 1992년 국교 재개 후 주로 경제 협력을 통해 관계를 증진해 왔습니다. 지금 베트남은 한국의 교역국 중 중국 미국 홍콩 다음의 4대 교역국입니다. 5위인 일본과의 교역량보다 배나 많습니다.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의 생산액이 베트남 GDP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기업의 투자가 베트남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의 해외투자는 중국에 집중됐으나, 중국의 인건비 상승 등 투자여건 악화로 실패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의 대비 소홀의 탓도 있겠으나, 중국 측 파트너들의 신의(信義) 배반으로 인한 실패 사례도 많다고 합니다. 국내 기업들이 중국을 떠나 신의 리스크가 비교적 적은 베트남으로 투자처를 옮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화적으로도 동남아에서 한류 붐이 가장 활발한 나라이고, 한국 내 베트남인과, 베트남 내 한국인이 각각 8만여 명, 그중 국내에 와 있는 베트남 유학생 수는 중국 다음으로 많아 1만5,000여 명(2017년 말 현재)입니다.

한 정치인이 "한국 남성은 베트남 여성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해 물의가 빚어졌지만,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외국 여성 중에서 베트남 여성이 가장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앞으로 한국과 베트남이 혈연적으로도 밀접한 유대를 갖게 될 나라임을 의미합니다.

그런 인적교류는 이미 800년 전 월남의 이씨(李氏) 왕조가 멸망하던 때 고려로 망명 온 이용상(李龍祥) 왕자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는 고려 조정의 배려로 옹진의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가 됐고, 현 베트남 정부는 그들에게 베트남 국적을 부여해 오늘날 양국 간 우호 증진의 가교가 되어 있습니다.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방이라고 여겼던 주변의 강국들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일본과는 협력과 교류의 역사도 길지만, 적대와 침략의 역사가 더 깊어 과거의 상처가 덧나기 일쑤입니다.

베트남은 이런 시대에 한국의 진정한 우방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나라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대결보다는 협력의 기회가 더 넓게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박항서 매직이 하나 더 보태진 것입니다.

박항서 매직은 그가 베트남 대표팀을 맡은 지 1년 남짓 짧은 기간에 이룬 것입니다. 아직 변방축구 수준인 베트남 축구를 월드컵 본선 진출 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그의 매직은 완성됩니다. 그가 그 일을 달성할지는 두고 볼 일이나, 그는 이미 오래 지속될 양국 우호증진에 튼튼한 디딤돌이 됐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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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게스트칼럼 /홍승철

길 위에서 들은 생업 이야기

유튜버가 초등학생들의 선호직업 5위에 진입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세상이 변화한다는 또 한 가지 증거입니다. 학생들의 직업 선호도만 변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에 진출한 젊은 세대가 하는 일들에 내가 꿈꾸어보지 못한 분야가 많습니다. 길 위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디어아트 전시를 했다는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미디어아트를 어떻게 사업으로 연결하나요?”
“사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좋아서 미디어아트를 합니다.”

아, 나의 무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에게 감히 “그러면 생계는 어떻게 꾸려 갈 것이냐?”고 묻지 못했습니다. 내가 과거의 인물인 듯했습니다. 강남대로나 홍대 근처의 클럽에 드나들 정도의 젊은이가 연예기획사에 외국인 투자자를 알선하는 일을 업으로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는 선배에게 “런던에 점포를 내고 싶으니 잘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젊은이도 보았습니다.

내가 생각지 못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새로울 것 없는 일이지만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직 서른이 안 된 나이에 자기 점포를 운영하면서 투 잡을 한다던 청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선배는 카페를 열어서 성공했어요. 번 돈으로 다른 장사에 투자했어요. 카페는 종업원에게 맡기고 말이죠. 새로 투자한 곳에서는 벌지 못했어요. 그 일에 시간을 쓰는 사이에 잘 되던 카페도 벌이가 시들해졌지요. 종업원에게만 맡기다 보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요? 할 수 없이 선배는 새로 벌인 일은 접고 다시 카페 일에 전념하고 있어요. 그 전처럼 잘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요.”

열심히 살고 있는 인생이 다 존경스럽지만, 요즘의 내 마음에 각별하게 다가온 두 사람이 있습니다. 지하철 합정역 7번 출구 근처에는 야간에 영업하는 이른바 푸드 트럭이 넷 정도 있습니다. 그중에도 떡볶이, 어묵, 순대를 파는 두 곳에 손님이 많은 편입니다.

이 작은 사업을 하는 한 여성은 마음 쓰는 일이 많습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일회용 컵에 따끈한 어묵 국물을 따르고 거기에 파 쪽도 넣어줍니다. 삼천 원짜리 떡순이(떡볶이와 순대의 합)를 먹는 손님에게나 오백 원짜리 어묵 두 개 먹는 손님에게나 똑같이 합니다. 종이 냅킨과 이쑤시개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실 물도 갖추고 있는데, 한여름에는 얼린 물통을 놓아둡니다. 스테인리스 상판은 어묵에서 흘러내리는 간장으로 얼룩지곤 하는데 때마다 그걸 말끔하게 닦습니다. 손님이 좀 뜸해지면 가래떡도 보충하고 어묵 꼬치도 더 끼웁니다. 국물의 양과 간도 맞추어 놓아야 합니다.

나이도 적어 보이지 않는 그가 손님들에게는 언제나 밝게 대합니다.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 삼복더위 때 무심코 “아이구 더워!”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밤중에도 헉헉거리던 도심의 더위 속에서 그랬습니다. 무릎 앞에 떡볶이며 어묵을 익히고 순대를 덥히는 불이 있으니 덥지 않을 리 없겠지요. 손님이 한 명밖에 없을 때 그가 잠시 차에서 내립니다. 운전석 문 바깥 어두운 곳에서 구름과자를 한 대 피웁니다. 꿀 같은 시간이지 싶더군요. 

양주의 트럭 운전기사는 야채를 운송합니다. 일하다 보니 경매시장에도 관심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거기까지 관여하세요?”
“예, 경매를 살펴보고, 중매인들과도 대화하곤 합니다. 시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필요가 있어요. 배추 값이 한 트럭에 1천5백만 원씩이나 하는 걸 본 적도 있고 단 30만 원 하는 것도 보았지요. 운반비도 경기에 따라 차이가 큽니다. 나는 3.5톤 트럭을 운전하는데, 좋을 때는 양주에서 구리 청과물시장까지 운임으로 150만 원 받아보기도 했고 좋지 않을 때는 20만 원, 아주 물량이 적을 때는 10만 원 받은 때도 있지요.”
“경매는 이른 새벽에 하지요?”
“시장에서 경매를 일시에 다 하는 게 아니고 종류에 따라 시간과 장소가 달라요.”
“아, 그런가요? 전혀 모르던 일이네요.”
“호박 같은 과채(果菜)가 가장 이른 시간에 시작하는데, 밤 10시에 시작해서 12시 반쯤이면 끝납니다. 상추 같은 엽채(葉菜), 당근 같은 근채(根菜) 등 종류별로 다 별도로 하지요. 무는 근채이고 배추는 엽채이지만 각각 따로따로 해요.”

물량이 워낙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밤새도록 경매가 진행됩니다. 보통 내 일은 오후 2시쯤 시작해서 집에는 오전 2시경에 들어가니 대략 12시간 일하는 셈입니다.”
“어떻게 해서 야채 운송을 하게 되었나요?”
“이 일이 좀 나아 보여서 그랬지요. 처음엔 다른 사람이 처리하는 물량 중 일부를 나누어 받아서 운반했어요. 그 사람은 물량을 나누어 주곤 얼마간의 중간 마진을 취했죠.”
“재하청을 받은 거군요. 그럼 그 사람은 운전을 하지 않나요?”
“하지요. 혼자 다 운반할 수 없으니 나누어 준 거죠.”
“그렇게 남의 물량을 받아서 한 기간이 얼마나 되나요?”
“개인 용달업을 하다가, 야채 일을 2000년에 시작했는데 15년간 그렇게 했고 그 후론 혼자서 하니까 이제 3년 되었군요.”
“그런데 주문을 어떻게 받아요? 주문이 없어 쉬는 날은 없나요?”
“양주의 어느 작목반 작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어요.”
“그럼 이젠 다른 기사에게 물량을 나누어 주기도 하나요?”
“여름 한 철에는 약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물량을 다 채워 주진 못해서 20만 원 정도의 양이었어요. 그런데 이 분야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어, 제가 모르는 분야에 관한 이야기이니까 호기심이 생겨서 그래요. 말씀 듣는 게 무척 재미있었어요.”

호기심만으로 대화를 이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대화에서 그의 긍정적 태도가 느껴졌고, 그 태도가 내게도 전염되어 왔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사그라드는 듯한 내면의 에너지를 돋워주었습니다.  

필자소개

 홍승철 다온컨설팅 대표

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화학에서 경영기획, 경영혁신, 적자사업의 회생 노력 등을 함. 
1인기업 다온컨설팅을 만들어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경영컨설팅을 해 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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