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블루스--'블루'를 찾아서 [정달호]

이태원 블루스--'블루'를 찾아서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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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블루스--'블루'를 찾아서

2018.12.24

저는 글을 쓰기 전에 늘 제목을 먼저 생각해 둡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태원 블루스(Itaewon Blues) . . . 우선 그 자체로 멋진 것 같아 그렇게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조선시대의 한 역참(驛站)이었다는 '이태원'은 언제부턴가 매우 특별한 곳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칼럼의 주제가 될 만한 곳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블루스'라니 아무튼 제목부터가 좀 튄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이태원은 제가 사는 곳에서 전철 두 정거장 거리라서 저에게 지리적으로는 매우 가까운 곳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아니다, 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는데 근래 들어 어쩌다가 이곳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음식 거리로 유명하니 만큼 뭔가 맛집다운 맛집을 찾기 위해서라도 거길 가봐야지 하는 생각이 늘 있긴 하였습니다.

실제 이태원엘 자주 가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태원 한복판에 있는 문화 명소를 알게 돼서입니다. 이태원에 무슨 문화 명소라니, 하고 의아해할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거기서 멀지 않은 용산구청 부속 용산아트홀이 있다는 건 많이들 아실 터이지만 이태원 한복판에 또다른 문화 명소가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는 분만 아실 겁니다. 장소의 이름도 특별합니다. '스파찌오 루체/Spazio Luce' . . . '빛의 공간'으로, 이름이 제법 길지만 줄여서 보통 '루체'라고 부릅니다. 루체/Luce, 푸치니의 오페라 '라 토스카'의 대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의 바로 그 루체입니다. 이곳은 지하 공간이며 150석의, 작지만 훌륭한 아쿠스틱을 갖춘 괜찮은 콘서트홀로서 한국성악가협회의 둥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각별한 인연으로 이 성악가협회와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15년 전 데뮤즈란 성악가 그룹의 연주와 함께 벌어지는 패션쇼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올 연말에 와서 두 차례나 동 협회 주최 공연을 보게 되었답니다. 한 번은 11월 하순 용산아트홀에서 열린 성악콘서트였으며 두 번째는 지난 12월 5일 바로 이 루체에서 열린 협회 멤버들의 송년음악회였습니다. 전자, 후자 공히 1, 2부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 22명의 출연자가 있었습니다. 용산아트홀에서는 프로 성악가 두 분이 함께해주었고 루체는 순전히 아마추어들만의 연주였습니다. 

저는 비교적 음악을 좋아하는 편으로, 먼저 칼럼에서 썼듯이 11월 중 다섯 번이나 음악회에 가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큰 음악당에서 하는 콘서트야 그대로 좋은 것이지만 노련한 아마추어 가수들의 성악이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게 사실입니다. 누구나가 품고 있을 성싶은 '노래 잘하기'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4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아마추어 성악가들이 평생 쌓아 온 실력이지만 어쩌다 실수도 있고 프로에 비해 전반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도 저로서는 충분히 흥겨웠고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특별히 감동이 컸던 부분은 70대, 80대의 연세에 든 분들이 나와서 오페라의 아리아나 우리 가곡 또는 민요를 부르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송년음악회에서 어렵사리 노래를 마친 한 어르신 가수가 무대 뒤로 들어가자 "이분은 87세의 여성 회원입니다"라는 사회자의 설명이 있었고 이어 여기저기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항간의 속언(俗言)이 진실임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서늘한 실내온도임에도 얇은 드레스를 입고 열창하는 그 여성분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이제 다시 제목의 주제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그렇게 즐겁다면 굳이 이태원에다가 블루스란 말을 붙여서 뭘 하겠다는 거냐, 하는 의문이 드시기도 하겠죠? 사실 블루스의 어원은 블루입니다. 불루(blue)라는 색깔,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화가이자 색채학 전공자인 한 지인에 의하면 블루 칼러는 한색(寒色)으로 통하지만 따뜻한 면도 있다고 합니다. 또 해외 작가 중 블루를 주 색채로 써서 작품을 하는 분에 의하면 블루에서 에너지를 얻는다고 합니다. 문학작품에서도 블루를 주제로 하는 것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블루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저 자신도 3원색의 하나인 블루를 거리에서나 작품 세계에서나 늘 눈여겨봅니다. 아직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지만 빨강, 노랑, 파랑의 3원색 중 파랑이 다른 두 색으로부터 등거리에 자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가긴 합니다. 

사전적으로 블루(blue)는 청색 외에도 '우울하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이 돼 있지요. 그래서 블루 먼데이(blue Monday) 란 말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도 결국 우울을 기조(基調)로 하고 있기에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것으로 압니다. 재즈와 블루스를 비교한다면 후자가 삶의 고달픔을 더 잘 전달한다고 봅니다. 저는 음악을 전문적으로 탐구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사실 부담스럽긴 합니다. 어쨌거나 '이태원 블루스'란 제목을 생각하게 된 것은 이태원이 겉으로는 흥청대는 분위기라서 즐거움과 흥겨움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슬프고 씁쓸한 면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6호선 이태원역과 한강진역 주변은 이태원의 화려한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큰길에서 벗어나 골목길에 들어서면 힘겹게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새벽부터 밤까지 온갖 물건을 팔아서 어렵사리 살아가는 서민들의 고달픈 일상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리가 더 화려해질수록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생겨 임차료가 더 싼 지역으로 밀려나는 상인들이 많아진다는 것도 슬픈 현실의 하나입니다.

어느날 루체에서 나와 이태원로를 산책하다가 문득 블루 브릿지(Blue Bridge)란 간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다가가 살펴보니 와인과 간단한 음식을 파는 곳이었는데 이 집 주인도 무언가 블루에 끌린 사람인가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주변에 블루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젊은층들의 로망 한 부분을 채워 주는 대중문화의 전당 블루스퀘어가 이태원 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블루진을 입은 층이 주로 출입하지요. 이태원에서 좀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원스 인 어 블루문(Once in a Blue Moon)'이라는 라이브 재즈 하우스가 있는데 라이브 재즈를 연주하며 칵테일, 와인, 맥주, 샴페인 등을 팝니다. 중앙 무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2층 공간으로서 청춘 남녀 또는 나이를 생각지 않는 중년층이 많이 찾는 곳이지요. 유사한 재즈 공간이 도심 곳곳에 있지만 홍대입구 서편 언저리에 한때 달빛(Moon Gloss)란 이름으로, 소위 1세대 연주가들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재즈 공간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수년 전에, 오른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았다고 하니 이 또한 재즈와 블루스를 오가는 삶의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현상이 아닐까 싶군요.

꼭 장소의 이름만이 아닙니다. 애주가나 미식가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이름 중에도 블루가 적지 않습니다. 한두 가지 예로 블루레벨, 블루치즈 가 있지만 이 외에도 실제 푸르다는 뜻으로 '블루'가 들어간 것들이 많아 보입니다. 또 블루칩, 블루오션 등은 나날이 귀 아프게 듣는 말들이지요. 멕시코 상공에서 어쩌다 볼 수 있다는 푸른 색의 달 블루 문(blue moon),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블루 더스트(blue dust) 등 도처에 블루라는 이름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블루를 찾는다고 하니 한 지인은 '블루하우스'도 있지 않느냐고 빈정댑니다. 그렇군! 뉴스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장소의 이름이 바로 그거지, 하면서 그렇다면 블루하우스는 '우울한 집'인가, 하고 고소를 금치 못한 적도 있습니다. 

'블루하우스'야 청기와를 썼기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지만 앞서 예를 든 다른 사물들에 붙은 '블루'들을 생각하면 3원색 중 왜 블루만 그렇게 많이 쓰이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블루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매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저로서는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에게 답을 미룰 수밖에 없겠습니다. 여러분은 셔츠, 손수건, 모자, 스카프나 머플러 등을 고를 때 어떤 색을 선호하시는지요? 저는 검정 코트나 검정 드레스에 진한 블루의 스카프를 두른 모습을 보면 알 수 없는 매혹에 빠집니다. 아닌 게 아니라 검정 바탕이라면 무슨 색인들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빨강, 노랑 외에 진한 초록이나 보라, 자주 등등. . . 대부분의 강한 색들이 다 어울리지만 코발트 블루라면 더 눈을 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태원 블루스 얘기가 블루에 관한 얘기로 이어졌습니다만, 주변에서 블루를 만날 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고 혹 그날이 더 즐거워진다면 저로서는 블루 이야기를 꺼낸 보람을 느낄 것 같습니다. 블루의 스카프나 머플러를 하고 상대를 만나러 가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태원 길을 걸으면서 빛의 공간 루체에 들러보십시오. 이태원을 비추는 빛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빛의 색깔 중 가장 중심에 블루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제멋대로 해봅니다. 그리고 이따금 후회만 하고 실행을 하시지 못한 잠재적 성악가 독자님들은 루체에 가서 새로운 전기(轉機)를 만들어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거기서는 사회 명사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블루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하고 보니 '블루~ 블루~ 블루~ '로 나가는 흘러간 팝송 가락이 떠오르기도 하고 '블루스 블루스 ~ ~ '라는 구절이 들어가는 우리 가요도 떠오릅니다. 오늘이 월요일이지만 성탄 전야이기도 해서 결코 '블루 먼데이'일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도 합니다. 넘어가는 무술년 남은 며칠이라도 블루와 블루스와 함께하는 즐거운 날들이 이어지시기 빕니다. 

*** '블루 더스트'라는 이름의 네이버 카페도 있는데 중년싱글을 위한 인문 치유 공간이라는 소제목이 흥미를 끕니다. 먼지 같은 인생도 언젠가 별이 될 수 있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가져왔다는 설명이 붙어 있네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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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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