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을 응원함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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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을 응원함
2018.12.07
지금 국립한글박물관(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9)에서는 ‘사전의 재발견’과 ‘명필을 꿈꾸다’, 두 기획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사전’은 9월 20일부터 12월 25일까지 열리며 11월 5일 시작된 ‘명필’은 내년 1월 20일까지 계속됩니다.사전 전시회는 한글사전의 역사와, 사전에 담긴 시대상과 문화를 다각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조선을 찾아온 선교사가 선교를 위해 사전을 만들자 비로소 사전에 눈을 떴습니다. 1894년 고종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선포하면서 국어사전의 역사가 시작돼 1910년대 ‘말모이’ 원고를 거쳐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최초의 우리말 사전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이 발간됐습니다.전시회는 한국어 대역사전의 효시로 평가되는 파리외방선교회 선교단의 '한불자전 필사본'부터 첫 우리말 사전 원고인 '말모이', 최초의 대사전인 한글학회 '큰사전' 등 중요자료 211점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잘 알게 해주는 전시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말대로 “한 민족이 남의 식민지가 되더라도 자기 말을 잘 지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한국과 중국의 서예 전통을 비교하는 또 다른 전시 ‘명필’은 한글박물관의 기획으로는 좀 이색적일 수 있다 싶습니다. 17세기 이후 한국과 중국의 서예 공부 방법을 주제로, 중국 산둥(山東)박물관 소장품을 소개하는 '청인(淸人)의 임서(臨書)'와 국립한글박물관의 '명필을 꿈꾸다'로 구성된 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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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난정서' 임서.
임서는 옛 명필들의 법첩을 보면서 글씨를 쓰는 것으로, 서예인들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기본 학습방법입니다. 초서로 유명한 왕탁(1592∼1652)이 그렇게 왕헌지의 ‘경조첩(敬祖帖)’을 따라 쓴 작품, 천하제일행서라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를 청나라의 심전(沈筌)과 우리나라의 추사 김정희, 김태석(1874~1951)이 임서한 것 등 양국의 유물 120여 점이 출품됐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예서와 전서 연구를 알려주는 간송미술관의 ‘한전잔자(漢篆殘字)’ ‘전의한예(篆意漢隸)’, 영남대박물관의 '곽유도비 임서' 등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실의 한글 궁체 임서와 습자 자료를 비롯해 20세기 초의 한글 서예 교육과정도 볼 수 있습니다. 서기(書記)상궁과 사자관(寫字官)의 글씨 등 보기 드문 자료가 많습니다.국립한글박물관과 중국 산둥박물관이 2017년 '문화교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덕분이라지만 이런 전시를 기획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2014년 10월 개관 이래 첫 전시인 ‘세종대왕, 한글문화 시대를 열다’ 등 의미 있는 기획전시를 많이 해왔습니다. 지난해 겨울 개최한 ‘겨울 문학 여행’은 큰 호평을 받았고, 박물관 측은 이를 문화상품으로도 개발했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2014년 10월 개관).
그런데 늘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전시공간이 너무 옹색한 점입니다. 오밀조밀 아기자기하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작고 좁은 집에 어렵게 세간살이를 펼쳐 놓고 사는 느낌을 줍니다. 공간이 작고 좁다 보니 전시의 효율성을 더 따지게 되고 그래서 더 기발한 디자인과 배치가 나올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기획전시실 두 개는 활달하고 탁 트인 느낌이 없습니다. 유물 관리상 조명을 더 환하게 할 수 없겠지만 좁은 공간에 실내가 어둡다 보니 차분한 걸 지나쳐 침잠하는 무거움을 느끼게 됩니다.또 하나 박물관의 책임자가 지나치게 자주 바뀝니다. 4년 남짓한 기간에 관장이 벌써 4대째입니다. 특히 ‘명필’ 전시회를 기획한 김재원 전 관장은 지난해 12월 전시 준비를 위해 중국 출장을 갔다가 급성 호흡정지로 숨졌습니다. 전시장 한구석에는 그를 추모하는 꽃 한 송이가 접착테이프로 붙여져 있습니다.
김 전 관장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엘리트 관료였지만 최순실 국정농단에 간여한 김종 전 문체부 차관 밑에서 체육정책실장으로 일했다는 이유로 2017년 9월 본부 실장(1급)에서 한글박물관장(2급)으로 강등발령을 받았습니다. 정부가 한글박물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알게 해준 인사였습니다. 그는 강등을 당하고도 열심히 일하다가 순직했습니다. 그의 전임 관장은 정반대로 박근혜 정부 당시 핍박을 받았다 해서 문재인 정부의 인수위원회 성격을 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거쳐 지금은 다른 자리로 옮겨갔습니다. 현재 관장은 전임 관장의 타계로 갑자기 이 자리를 맡게 됐습니다.한 지붕 세 가족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원래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바람 잘 날 없는 곳이지만, 이렇게 관장이 자주 바뀌어서야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 벌써 12월 초인데 내년도 전시 일정이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다니 속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전시장을 좀 더 확충하고 관장의 직급도 올려서 국립한글박물관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상을 안팎으로 갖추기를 바랍니다. 설령 이런 게 하나도 실현되지 않는다 해도 박물관 사람들은 결코 실망하지 말고, 인문학의 깊이가 있는 참신하고 좋은 기획을 계속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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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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