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탄소중립안은 비현실적...다음 정부서 다시 만들어야'
김상협 카이스트 초빙교수,
전 청와대 녹색성장기획관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유럽 순방 하이라이트는 11월 1일부터 이틀간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기후정상회의다. 문 대통령은 여기에서 한국의 2050 탄소 중립 비전과 더불어 2018년 대비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40%로 대폭 높인 야심 찬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중국 시진핑 주석이 불참한 가운데 문 대통령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를 비롯, 서방 지도자들로부터 아마도 찬사와 격려를 받을 것이다.
평소 한국의 적극적인 기후 대응과 탄소 중립 노력을 지지해온 필자의 심정은 그러나 착잡하다. 문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약속하는 탄소 중립은 실제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집약된다. 먼저 ‘협치 파괴’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위안부 공금 유용으로 당에서 쫓겨난 윤미향 무소속 의원까지 동원해 탄소중립기본법을 급조했다. 국가의 미래가 걸린 이 법안에 대해 제1야당인 국민의힘과 제대로 된 논의는 생략한 채 힘으로 밀어붙였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국가기후환경위원회 위원장이 “2050년까지 7명의 대통령이 탄소 중립을 추진해야 하는 만큼 초당적 협력이 중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허사였다.
더 심각한 것은 문 정부의 탄소 중립이 ‘경제 포기’로 치닫고 있는 점이다. 탄소중립위원회는 탄소 중립에 필요한 구체적 비용과 투자 계획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특히 탄소 중립은 나라의 경제와 산업구조를 바꿀 만큼 중차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산업계의 의견 수렴은 사실상 배제됐다. 한국처럼 제조업 비중이 높은 독일이 WTO 규정을 위반한다는 말을 들을 만큼 산업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과 크게 대조된다. 더구나 탄소중립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순진씨는 ‘역성장(de-growth)’을 기후 대응의 해법으로 제시해온 인물이다. 학계에서는 현 정부의 탄소 중립 계획이 강행되면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하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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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기술 중립(Technology Neutrality)’의 기본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점이다.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기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정책적 수용성과 경제성을 면밀히 비교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현 정권에는 대못과 같은 전제가 달려 있다. ‘탈원전’이 그것이다. ‘탄소 중립 실천안을 만들어라. 그런데 원전은 안 된다’라는 지엄한 명령 앞에 부처를 가릴 것 없이 관료들은 허구적인 대안을 보고한다. 모 당국자는 “원전 사고를 겪은 일본조차 2050년에 원전을 20% 수준으로 유지하는데 우리는 6~7%로 급격히 줄이도록 미리 정해져 있어 현실적인 안을 만들 수 없다”며 “다음 정부에서 새로운 안을 만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일본·중국은 물론 미국·프랑스·영국 등이 저탄소 기저 발전인 원전을 탄소 중립의 핵심 에너지원으로 삼고 있지만 우리는 얘기조차 꺼내기 어렵다.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정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5년마다 상향 조정하도록 제도화했다. 후퇴할 수 없도록 이른바 ‘톱니바퀴 원칙(ratcheting frame)’을 심어 놓은 것이다. 문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하이라이트를 받는 대신 그 결과와 책임은 온 국민이 지게 된다는 뜻이다. 다행히 이상과 현실의 ‘갭’을 반영, 유엔에서 매년 그 내용을 조정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두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문 대통령이 발표한 40% 감축 목표의 구체적 이행 전략은 다음 정부에서 다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새 대통령은 이념이 아니라 과학, 목소리만 큰 집단이 아니라 최고 전문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에너지 믹스를 만들고 국민적 합의 과정을 거치기 바란다. 그게 진짜로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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