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 공모전의 '보이지 않는 손'
[더오래] 건축설계 공모전의 '보이지 않는 손'
손웅익의 작은집이야기
건축사사무소 중에 안정적인 건설회사의 협력업체인 경우는 프로젝트 수주 걱정을 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무소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건축사사무소는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고군분투한다. 건축설계도 의사처럼 분야별 전문가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특화되지 못하는 이유도 수주의 어려움 때문이다.
과거에는 빈 땅도 많았고 빈 땅을 그냥 두면 세금을 내야 하는 공한지세가 있었다. 강제로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엔 건축설계 일이 넘쳐났다. 이제 대규모 개발 광풍 시대가 지나고 건설 분야도 침체기에 들어갔다. 아파트도 한계에 이르렀다. 아파트 신규프로젝트가 있다 해도 몇몇 대형 건축사사무소에서 다 가져간다. 도시형생활주택이나 다세대주택 등의 수요는 거의 사라졌다. 업무시설도 공실이 많은 현실이다. 근린생활시설은 경기침체와 더불어 수요가 더 줄었다. 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복지시설의 수요도 적고 요양시설도 다들 운영이 어렵다고 한다. 종교시설도 확장에 한계가 있다. 이제 새로 지을 땅도 없지만 특별히 요구되는 시설도 없다. 이러한 현실이니 특히 사무소를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건축사들은 업무 수주가 어려운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건축사들은 현상설계 공모에 참여한다.
현상설계공모는 경쟁을 통해 더 좋은 작품을 선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 현상공모가 발주처로서는 큰 비용 지출 없이 최상의 작품을 얻을 수 있는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건축뿐만 아니라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상징조형물도 대부분 현상공모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현상설계공모는 지명 현상공모가 있고 일반 현상공모가 있다. 지명공모는 실적도 있고 명성도 있는 건축사사무소를 발주자가 지명해서 설계공모에 초청하는 것이다. 대체로 적게는 3~4개, 많아야 5~6개 사무소를 지명한다. 설계공모에 소요되는 비용을 발주처에서 어느 정도 보전해 주므로 낙선해도 크게 손해 볼 일도 없다.
그에 비해 일반 현상공모는 말 그대로 일정한 자격을 갖춘 건축사사무소라면 누구나 자의로 참여할 수 있다. 보통 수십 개 사무소가 참여한다. 자의로 참여하는 만큼 그에 소요되는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현상설계공모의 제출물이 과거보다 많이 간소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제출물을 제작하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 조감도나 각종 그래픽 등 협력업체에 지불하는 비용이 많이 들고 제안서의 편집이나 제출물의 인쇄비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준비하는 동안 직원들의 기회비용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 비용을 따져보면 한번 현상공모에 참여하는데 최소 수천만 원이 지출된다. 현상공모의 경우 당선작을 낸 건축사사무소에는 설계권을 주고 낙선작 중 우수작, 가작 몇 개는 일정 비용을 지불하는데 대체로 지출한 비용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비용이다. 낙선하면 그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수많은 건축사의 희생을 요구하는 현상공모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정성과 투명성이다. 그러나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건축사들은 의심하고 있다. [사진 Pixabay]
그러면 수많은 건축사의 희생을 요구하는 현상공모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정성과 투명성이다. 그러나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건축사들은 의심하고 있다. 최근에 발생한 세종시 신청사 설계공모전 담합논란은 건축계를 들썩이게 했다.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상징조형물의 발주 비리는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그중에는 심사위원들의 수준에 문제가 있어서 표절 작품에 대한 검증도 없이 작품을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는 설계자를 내정해놓고 공정성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는 수단의 하나로 현상설계방식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목적을 위해 들러리를 세우는 것인데 도덕적으로도 비난받아야 한다.
공사비의 5% 내외인 설계시장이 이런 지경이니 공사 입찰은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 공사입찰심사 명목으로 건설회사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수십 명 비리 교수들의 명단은 지금도 인터넷에 남아있다. 요즘엔 심사위원들의 채점표를 공개하니 그나마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공정성을 극대화한다는 이유로 제안서 발표조차 블라인드 방식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얽히고설킨 건축계의 네트워크를 생각하면 어떤 방식을 택하든 객관적 평가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실력으로 당당히 수주하려는 건축사들은 오늘도 현상공모에 도전하고 있다. 발주처의 공정성과 투명성만이 이들 건축사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고 예의다.
프리랜서 건축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