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특허만 쏟아내는 한국과학..."인재들 해외로 빠져나가"



"R&D 성공률 98%'가 오히려 한국 과학 망친다

[한국 과학이 흔들린다]
한해 연구비 20兆, 세계 5위지만 어려운 장기 과제는 회피 단기 과제로 쪼개고 나눠먹고… 양자연구비 2300억, 과제 235개 "건당 10억… 장비 하나 사면 끝" 결국 쓸모없는 특허만 쏟아내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4.55%)이 세계 1위다. 한 해 연구비 규모가 20조원으로 세계 5위다. 정부의 연구·개발(R&D) 과제 6만3000여개 중 98%가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 발표대로라면 양과 질에서 단연 세계적 과학 강국이어야 한다.

실패 위험 큰 연구는 회피… 인재들 해외로 - 미국 뉴욕에 있는 IBM 왓슨연구소에서 과학자들이 양자컴퓨터를 구동하는 초전도 장치를 살펴보고 있다. 왼쪽은 한국인 과학자 백한희 박사다. 실패 위험이 있는 연구를 회피하고 유행만 따르는 한국 과학계의 풍토가 우수 인재들을 밖으로 내몰고 있다. /IBM



그러나 대한민국은 미래를 좌우할 핵심 과학기술에서는 약소국이다. 인공지능(AI)과 함께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꼽히는 양자통신·컴퓨터 분야가 대표적이다. 논문의 질과 연구 예산 모두 한국은 조사 대상 20국 중 17위에 그쳤다.

양자 컴퓨터가 실현되면 수퍼컴퓨터가 1만년 걸려 풀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다. 양자 암호 통신은 해킹이 불가능한 정보 전달을 이룰 수 있다. AI가 상용화되려면 양자 정보 통신 인프라가 필수라는 말이 나온다. 놀랍게도 양자 정보 통신이 막 태동하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한국 연구자들은 수는 적어도 연구 수준은 미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 같은 괴리 현상은 왜 생긴 것일까. 해외 양자 업체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는 "한국 과학엔 선택과 집중, 장기 전략, 하이 리스크(high risk·고위험) 연구가 없다"며 "이래서는 퍼스트무버(first mover·선도자)는커녕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추격자)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눈앞만 보는 한국 과학
한국 과학계에는 '선택과 집중' 대신 '나눠 먹기' 풍조가 자리 잡고 있다. 2004~2018년까지 15년간 우리나라 양자 분야 연구비는 2300억원. 하지만 과제 수가 무려 235개다. 산술적으로 건당 10억원이 안 된다. 국내 한 양자 전문가는 "장비 하나 사면 끝나는 돈"이라며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는데 특혜 논란을 피하려 여러 단기 과제에 푼돈만 뿌리고 끝난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적 안목 없이 눈앞의 성과만 좇는 '근시안'도 발목을 잡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16년 처음으로 5000억원대 양자 정보 통신 대형 연구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2017년, 2018년 예비 타당성 조사에서 연속 탈락하며 사실상 백지화됐다. 구글·IBM 등 세계적 기업이 양자 연구에 뛰어들었는데 우리 정부는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정부는 올해부터 5년간 445억원을 양자 연구에 쓰기로 했다. 한 해 예산이 수천억~수조원에 이르는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소꿉장난 수준이다. 중국은 내년 안후이성 허페이에 문을 열 양자정보과학국가연구소에 5년간 1000억위안(약 16조8000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중국은 양자 정보 통신 특허출원 건수가 지난해 492건으로 미국(248건)을 앞지르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쓸모없는 특허만 양산
한국 과학계에서는 도전적 연구보다 유행만 좇는 연구가 반복되고 있다. 그래핀이 뜨면 그래핀에 관한 과제들이, 태양전지가 뜨면 관련 연구가 쏟아지는 식이다. 정부 출연 연구소의 한 연구 책임자는 "최근에는 일본의 수출 규제로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키우자는 흐름에 따라 이곳에 반짝 돈이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소·부·장 예산은 지난해 8000억원에서 두 배 이상인 2조1000억원 규모로 늘었다. R&D 예산은 이 가운데 60%인 1조3000억원이다.

하지만 유행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일본이 소·부·장 분야를 무기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벨상을 7개 받을 정도로 수십년간 연구했기 때문이다. 과학계에서는 "짧은 호흡의 연구로는 절대로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험 부담이 큰 대형 장기 연구는 사라지고 과제 쪼개기가 판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한 연구원은 2016년 한 해 무려 20개의 과제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 중 실제로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의심되는 과제가 절반이 넘는다. 과제 수를 늘리려고 잘게 쪼갠 것이다. 외부에서 과제를 수주해 인건비를 충당하는 연구과제중심(PBS) 제도 이후 정부 연구소에서는 대형 연구보다는 성과를 내기 쉬운 단기 과제를 많이 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국내 박사급 연구 인력(10만명)의 60%를 보유한 대학도 사정은 비슷하다. 독자적 연구 능력이 있는 박사후연구원(포닥)보다는 석·박사 학생이 연구의 주축이다 보니 학생들이 논문을 쓰기 쉬운 단기 과제가 주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구 생산성은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최근 5년간 24개 정부 연구기관의 연구 생산성은 평균 3.05%였다. 연구 생산성은 매년 기술이전으로 얻은 수입료를 전체 연구·개발비로 나눈 값이다. 미국의 공공 연구소들은 생산성이 매년 10%대를 유지한다.


최근 5년간 정부 출연 연구소가 출원한 특허 3만5209건 가운데 현장에 이전돼 활용 중인 특허는 38.9%인 1만3710건에 불과하다.



인재들은 해외로 내몰려
실패 위험이 있는 연구를 회피하는 풍토는 인재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홍정기 포스텍 명예교수는 1990년대에 양자 정보 통신의 근간이 되는 단일 광자 실험에 세계 최초로 성공했지만, 국내에서는 연구비 지원을 못 받고 응용 분야인 레이저 연구로 전공을 바꿨다.

IBM의 백한희 박사나 중국 칭화대 김기환 교수 같은 세계적 양자 컴퓨터 연구자들도 국내에서는 "되지도 않을 연구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걸 하라"는 말만 듣고 해외로 발길을 돌렸다. 국내 한 AI 연구자는 "실패 위험이 큰 연구도 장기적 관점에서 과감하게 지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유지한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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