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면옥과 긴자식스

을지면옥과 긴자식스
김덕한 산업1부장


"노포를 왜 없애나" 주장에 서울시 도심 재생 기회 날려
흥행과 돈, 표만 좇다간 세계 도시 경쟁서 계속 밀릴 것

    13년간 추진돼 온 서울 세운3구역 재정비 사업이 을지면옥 보존 논란에 휩싸이면서 또다시 중단됐다.

을지면옥은 수많은 단골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평양냉면 맛집이다. 없어진다면 서운해할 사람이 많겠지만 대체 무엇을 보존할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을지면옥의 맛과 정취는 이어가야겠지만 칙칙한 을지로 뒷골목 낡은 건물까지 굳이 지켜야 할까. 보존해야 할 것은 문화적 소프트웨어인데 엉뚱하게 조형적 가치도 없는 하드웨어만 부각되고 있다.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 재건축, 재개발 사업은 우리 사회에서 이제 죄악시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훌륭한 노포(老鋪)를 밀어버리느냐'는 얘기가 부각되자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을지면옥이 철거 대상에 들어 있었던 것을 "몰랐다"면서 사업을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이 사업은 전임 시장들이 시작한 것이고 2011년 박 시장이 백지화하긴 했지만 2014년 계획을 바꿔 사업을 재개했다. 사업시행인가까지 내줘 일부 철거까지 시작됐는데 몰랐다고 하면 무능한 것이고 대선(大選) 주자로서 이미지 관리에 나섰다면 무책임한 것이다.

세운상가 주변 지역의 상징은 을지면옥, 양미옥(양·대창집) 같은 식당들이 아니다. 몇 대에 걸친 노포가 즐비한 일본에서도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닌 곳이 많은데 1985년 이 자리로 옮겨 온 을지면옥이 이 사업 때문에 명맥이 끊긴다는 주장 역시 무리다.



세운상가는 전쟁의 상흔을 딛고 곳곳에서 밀려든 장인(匠人)들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으로 건설 장비, 음향기기, 조명, 자동차·항공기 공구 등을 뚝딱 만들어 낸 곳이다. 수도(首都) 도심에 이처럼 제조·판매 기능을 한꺼번에 갖춘 상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기술도, 산업도 변변이 없던 한국이 어떻게 도깨비처럼 압축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산업 유산이 이 지역의 상징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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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산은 제쳐두고 '식당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만 '흥행'에 성공하는 게 우리 사회다. 쇠락한 공구상을 찾는 사람은 드문 반면, 식당들은 오늘도 장사를 잘하고 있으니 사업을 서둘 이유도, 꼭 성공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이 식당의 '흥행'에 기대어 돈과 표를 노리는 사람들만 몰려들 뿐이다.

그러나 강력한 대규모 개발 형태의 도시 재생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성장 한계에 봉착한 세계 각국의 유력 도시들은 도시 재정비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2000년대 초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겠다며 '도시재생특별법'을 만든 일본은 일본답지 않은 유연한 아이디어와 황거(皇居) 앞 고도 제한까지 푸는 혁신적인 규제 개혁으로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도쿄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다.



도시를 어떻게 개발해 나가겠다는 청사진과, 도시의 상징과 정신을 살리는 전략과 지혜가 있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새 세운지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초고층 본사를 새로 지으면서 건물 앞쪽에 140여 년 전 창업 당시 본사 구조와 똑같은 저층 건물을 지어 박물관을 만든 미쓰비시, 건물 내부에 긴자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작은 길을 살린 긴자식스 같은 사례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도시 재정비는 미래 산업이다. 그 도시와 국가의 지적 수준과 품위, 국격까지 보여 줄 수 있는 국가 경쟁력의 상징이다. 건축의 정신과 문화는 없고 돈만 좇는 천박함, 장기 운영 계획 없이 한탕 분양 성공에만 매달리는 사업 모델, 경직된 행정이 도시 재생을 망치고 있다. 그 사이 용산, 동대문 등 서울을 탈바꿈시킬 수 있었던 기회들은 다 날아가 버렸다. 서울은 세계 도시들과의 경쟁에서 계속 뒤처지고 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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