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말하는 건축/'건축 오디세이’]생채기를 메우지 말라…‘비움의 미학’

여성이 말하는 건축

조재원 건축가·공일스튜디오 대표 


  작년에 출판된 『우리는 여성, 건축가입니다』(원제: 『where are the woman architects?』 Despina Stratigakos 지음)의 추천사를 쓴 이후로 제목이 화두처럼 머리에 남아있었다. 애타는 부름에 화답이라도 하듯, 새해가 밝자마자 『빌딩롤모델즈-여성이 말하는 건축』이 출간되었다. 건축을 공부하고 다양한 방향으로 경력을 쌓고 있는 여섯 명의 30대 여성들(김그린·김자연·이다미·이보름·정유리·주명현)이 의기투합해 만든 ‘여집합’이라는 기획집단이 펴낸 책이다. 



  

많은 분야에서 자신의 일에 대한 지속적 성장을 꿈꾸는 여성들이 ‘롤모델’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업역으로 여겨왔던 건축이 예외일 리는 없다. 같은 아쉬움을 공유했던 여집합은 ‘롤모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신 ‘짓기로’ 했다. 이들은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촘촘하게 구성하고 건축의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들을 패널로 초대해 답을 듣는 2일간의 포럼을 열었다. 질문은 독립할 것인지, 조직에서 성장할 것인지의 선택부터 정년 이후의 삶까지 폭넓게 펼쳐졌다. 답하는 이들의 스펙트럼도 소규모 아틀리에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축가, 대형설계사의 대표와 임원, 소셜벤처 대표, 협동조합형태의 디자이너그룹, 건축전시기획자, 출판 에디터, 교수, 사진가까지 다양했다. 필자도 ‘건축가의 정년과 건축 이후의 삶’ 대담에 참여했다. 작년 6월의 일이다. 책은 포럼과 인터뷰를 통해 일과 삶으로서의 건축에 대해 여섯 명의 여성이 묻고 스물네 명의 여성들이 답한 기록이다. 

  

“건축의 서사에서 여성의 모습을 예외적이고 한정된 것이 아닌, 긴 생애에 걸친 당연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발견하고 공유하려 한다. 이는 여성 건축 서사의 확장, 나아가 한국 건축 서사의 켜를 두텁게 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기획자들이 밝힌 취지에 공감하여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참가자가 자신 앞에 붙는 ‘여성’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음을 피력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남성들한테는 남성이기 때문에 일반화시키는 프레임을 적용하는 경우가 없어요. 그냥 그 사람 자체를 하나의 캐릭터로 보거든요. 하지만 여성이라는 큰 프레임으로 저를 규정하고 나서 개인적인 퍼스낼러티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 문화에서 빨리 탈피했으면…·” -김정임(서로아키텍츠) 



  

“‘여성건축가’로 불리거나 성별에 따른 포션(portion)의 수혜를 원하지 않고, 그냥 건축가 정현아로 저의 작업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정현아(디아건축) 


지난해 빌딩롤모델즈 포럼이 책으로 나왔다. [사진 여집합]

  

결과적으로 이런 우려를 불식한 것은 ‘여성이 말하는 건축’에 자신의 이야기를 보탠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에 임하는 태도와 생각, 또는 건축을 통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론의 고유함이 ‘여성’이라는 수사로 간단하게 일반화될 수 없음을 이 책이 역설하기 때문이다. 건축계의 ‘여성’의 존재 혹은 부재를 화제로 혹은 문제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여성이 말하는(혹은 하는) ‘건축’에 방점을 찍으면서 이 책은 우리 인식의 의미심장한 문턱을 넘는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혹시 한눈을 감은 채로 우리를 둘러싼 건축을, 도시를, 그 속의 삶을 봐왔던 것은 아닐까. 텀블벅을 통해 책의 출판을 후원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감았던 한눈을 떠야만 보이는 새로운 영토의 발견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비로소 필자는 머리에 남았던 ‘여성건축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벗어났다. 지난해 6월의 빌딩롤모델즈 포럼에서 내 이야기이자 곧 우리 이야기, 일이자 곧 삶이 된 건축 이야기를 한판의 수다처럼 털어놓던 동료들과의 정서적인 어깨동무를 기억한다. 그리고 대담장을 가득 메웠던 호기심과 열정이 깃든 눈빛들을 기억한다. 이제 그들의 고유한 이야기와 성취에 대해 묻고 이야기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중앙선데이




'건축 오디세이’]생채기를 메우지 말라…‘비움의 미학’

이중원 건축가·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뉴욕 그라운드 제로


    미국 뉴욕에서 ‘핫’한 지역은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다. 시는 2001년 9·11테러로 무너진 ‘쌍둥이 빌딩(WTC)’ 자리에 15년을 투자해 천지개벽을 이뤘다. 16ac(에이커·약 6만4750m²)의 땅 중앙에는 쌍둥이 빌딩을 대신해 인공분수 2개가 있고, 분수 주변에는 새로 지은 마천루들이 도열해 있다. 유럽 유명 건축가 그룹 스뇌헤타의 ‘9·11기념박물관’과 건축가 칼라트라바의 ‘백색 비둘기 모양의 철로 역사’는 그라운드 제로 심포니의 일부일 따름이다. 그라운드 제로는 ‘미국 마비’를 노린 기획 테러를 ‘미국 건재’로 돌려놓았다.






WTC는 20세기 중반에 세워졌다. 록펠러 가문의 데이비드 록펠러(당시 체이스 맨해튼 은행 회장)의 프로젝트였다. 주요 금융회사들이 신도심(미드 타운)으로 이사를 가자 구도심(로어 맨해튼)의 부동산 가치가 하락했다. 데이비드는 록펠러 가문이 많이 소유한 구도심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고자 뉴욕 주지사였던 형 넬슨 록펠러와 WTC를 기획했다. 건축가로는 시애틀 토박이이자 일본계 미국인인 미노루 야마사키를 선임했다. 


야마사키는 1912년 시애틀에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애틀 워싱턴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야마사키는 학비를 마련하고자 방학마다 알래스카 연어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졸업 후 그는 기회를 찾아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디자인한 건축회사 ‘슈리브, 램 앤드 하몬’에 취업했다.


전쟁에 승리하자 미국에는 전례 없는 건설 붐이 일었다. 디트로이트 건축회사 ‘스미스, 힌치맨 앤드 그릴스’에서 야마사키에게 러브콜을 했고 야마사키는 이를 수락했다. 회사 내 지위와 연봉은 올랐지만 미국 중부의 인종차별은 동부보다 심했다. 회사는 간판 디자이너인 야마사키를 건축주 미팅에 등장시키지 않았다.


야마사키는 1949년 회사 동료 두 명과 독립했다. 1950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 격의 미국주택공사는 새로운 뉴딜 정책으로 공공 임대 아파트를 발주했다. 이때 수주한 프로젝트가 건축 역사에서 그 유명한 ‘프루잇-아이고’ 아파트다.




하지만 흑인 커뮤니티를 위해 세인트루이스에 세워진 이 아파트는 1972년 철거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트가 낡아 유지 보수가 필요한데,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돈을 쏟아붓느라 프루잇-아이고를 방치했던 것. 노후 아파트는 결국 우범지대로 전락해 철거하기로 결정됐다. 모더니즘에 반기를 든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 찰스 젱크스는 저서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의 언어’(1977년)에서 이 아파트 단지의 폭파일인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32분’을 모더니즘 사망일로 진단했다. 젱크스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야마사키는 모더니즘 건축을 끝내버린 장본인으로 낙인찍혔다.


그럼에도 그는 세인트루이스 공항, 시애틀 엑스포 과학관, 시애틀의 랜드마크인 IBM 타워와 레이니어 은행 타워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됐다. WTC 건축가로의 선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야마사키는 WTC를 준공한 뒤 1986년에 타계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로 WTC는 도마에 올랐고, 야마사키는 빠르게 잊혀져 갔다. WTC와 로어 맨해튼에는 먼지가 쌓여 갔다. 




2001년 테러 비행기는 먼저 북쪽 타워를 강타했고, 그 다음 남쪽 타워를 때렸다. 야마사키는 시애틀 구조 전문가 존 스킬링과 협업해 시애틀 마천루에서 실험한 특수 구조로 타워를 세웠다. 이 특수 구조 덕에 남쪽 타워는 강타 후 56분 만에 주저앉았고, 북쪽 타워는 102분 만에 주저앉았다. 약 1만7000명이 대피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돼 줬다.


그라운드 제로 마스터 플래닝 국제 공모전에 응모했던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2003년 폐허 현장에서 WTC의 기초벽이 건재함을 보고 일갈했다. “비록 민주주의를 넘어뜨리려고 했지만 아직 민주주의의 기초는 건재하다.” 유가족들은 그의 연설에 울며 환호했다.  


WTC는 무너졌지만 2개의 분수로 부활한다. 분수는 WTC 지하 기초벽 일곽으로 만들었다. 분수 주변 흑색 돌에는 금색 글씨로 죽은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음각되어 있다. 분수는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은 성역이 된다. 덕분에 죽었던 야마사키의 이름도 같이 부활한다.




폐허를 예술로 승화시킨 분수는 그래서 ‘집단 트라우마’를 ‘집단 힐링’으로 되돌린 부재의 미학이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랜드마크 건축이 됐다. 소비주의로 소란스러운 우리 도시에도 필요한 ‘건축 이상의 건축’이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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