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없는 풍력발전기 VIDEO: Wind turbine without blades
날개 없는 풍력발전기
골칫거리 풍력사업의 소음 문제
섬이나 오지에서 ‘좋아요’
최근 날개가 아예 없거나 연 모양을 한 신개념 풍력발전기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풍차형 풍력발전기가 소음이나 안전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데다, 풍차를 설치하기 어려운 오지나 배에서도 풍력발전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날개 없이 어떻게 풍력발전을 할 수 있을까.
9월 5일 오후 6시, 제주행 비행기. 착륙을 5분쯤 앞뒀을까. 해안을 따라 늘어선 수십 개의 하얀 막대들이 보였다. 연구를 위해, 혹은 실제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날개를 돌리고 있는 풍력발전기들이었다. 과연 ‘바람의 섬’ 제주다웠다. 이런 느낌은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이어졌다. ‘풍차마을’이라는 이름으로 홍보 중인 풍력발전단지에서는 외국에 온 느낌마저 들었다.
날개 없는 풍력발전기. 야구 배트처럼 생긴 위 기둥은 매우 가볍게 만들어져 쉽게 진동한다. 그 아래 흰 기둥에는
안쪽과 바깥쪽에 자석링이 들어 있어서 마치 용수철처럼 진동을 증폭시킨다. 두 기둥 사이의 까만 링은 선형 교류
발전기다. 기둥의 진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꾼다. 아래 QR코드를 스캔하면 실제 작동 영상을 볼 수 있다.
볼텍스 블레이드리스 제공
System uses ultrasound to keep bats away from wind turbines
https://newatlas.com/ultrasonic-bat-deterrent-system/57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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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낭만적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도로변에 바짝 붙어선 풍력발전기를 발견하고 멈춰 섰는데, 높이 100m짜리 타워의 육중함에 압도된 데다 길이가 70m에 달하는 날개 세 개가 ‘윙~, 윙’ 하는 낮은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자를 안내한 최정철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제주글로벌연구센터 연구원도 “무섭다”는 기자의 말을 달리 반박하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풍력발전기 근처에 아예 접근할 수 없도록 울타리를 설치합니다. 겨울에 혹시 고드름이 얼면, 아주 위험한 무기가 될 수도 있거든요.”
기둥 감싸 오르는 공기 이용한다
풍차처럼 생긴 지금의 풍력발전기는 풍력 발전 방식 중 경제성이 입증된 유일한 상업 발전 모델이다. 하지만 아직 풀어야 할 문제가 쌓여 있다. 예컨대, 산 위에 발전기를 설치하려면 자연 훼손이 불가피하다. 하늘을 날던 새가 발전기 날개에 맞아 죽는 일도 많다. 인근 주민들은 저음파 소음으로 편두통과 메스꺼움을 호소한다. 올해 7월에는 제주 김녕리 풍력발전기에 불이 났는데, 사다리차가 닿지 않아 화재진압에 애를 먹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신개념 풍력발전기가 속속 개발되고 있다.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장비 생산 기업인 ‘볼텍스 블레이드리스’사는 아예 날개를 없앴다. 거대한 기둥만 땅 위에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공동창업자 다비드 아네즈는 자체 제작한 유튜브 영상을 통해 “타코마 다리가 붕괴하는 영상을 보고 공기 소용돌이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타코마 다리는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 시의 좁은 해협을 잇던 다리로, 1940년 개통된 지 네 달 만에 붕괴됐다. 공기 소용돌이가 일으킨 진동이 이유였다(타코마 다리 붕괴 사건은 바람에 의한 진동과 다리 자체의 진동이 공명하며 증폭된 ‘공진’ 사례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공진이 아니라 단순히 공기 소용돌이가 다리를 심하게 흔들어 무너졌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공기 소용돌이의 일종인 ‘카르만 소용돌이’는 균일하게 흐르는 유체 속에 물체를 넣었을 때 유체가 물체 좌우 양쪽에서 번갈아 반대 방향으로 도는 현상이다(결국 물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린다). 잠수함이나 배의 진행을 방해할 정도로 에너지가 크다. 바람이 세게 불 때 전선에서 ‘윙윙’ 소리가 나는 원인도 카르만 소용돌이다. 볼텍스 블레이드리스사가 개발한 막대형 풍력발전기 ‘볼텍스’는 바로 이 같은 공기 소용돌이의 운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다.
제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지지 기반이 되는 기둥이 있고, 그 위에 점점 지름이 커지는 원형기둥이 올려져 있다. 이 기둥은 유리섬유와 탄소섬유로 만들어져 매우 가볍기 때문에 바람이 기둥을 감싸올라오며 공기 소용돌이를 만들 때 쉽게 진동한다. 두 기둥 사이에는 자석 링이 있다. 공동창업자 아비드 슈 리올은 e메일 인터뷰에서 “기둥 안쪽과 바깥쪽을 각각 감싼 자석링이 서로 밀어내면서 진동을 증폭한다”고 말했다.
그 위에 있는 선형 교류발전기는 진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꾼다. 일반적인 발전기는 회전운동으로부터 전기를 발생시키는 반면, 선형 교류발전기는 왕복운동을 전기로 바꿀 수 있다. 기둥이 진동할 때 위아래 기둥 사이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선형운동으로부터 전기를 발생시킨다. 볼텍스 블레이드리스사는 지금까지 높이 13m인 시제품 ‘볼텍스 미니’를 이용해 4kW의 전력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고, 컴퓨터 하나를 돌릴만한 100W급 ‘볼텍스 아틀란티스’(높이 3m)와 1000여 명이 쓸 수 있는 1MW급 ‘볼텍스 그랜’(높이 150m)도 개발 중이다.
볼텍스는 회전하는 부품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제작 비용이 매우 싸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공동창업자 다비드 아네즈는 홈페이지를 통해 “기존 풍력발전기에 비해 건설비용은 53%, 운영비용은 51% 절약할 수 있고, 유지비는 80%, 탄소배출량은 40% 줄일 수 있다”며 “전력 생산 효율은 기존 발전기에 비해 30% 가량 낮지만, 같은 면적에 더 많은 발전기를 설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알트에어로스 에너지스사는 발전기가 달린 헬륨 비행선을 개발했다. - 알트에어로스 에너지스 제공
풍성한 고(高)고도풍으로 에너지 UP
높은 고도의 바람을 이용하려는 시도도 있다. 한전 전력연구원 녹색성장연구소가 펴낸 ‘공중 풍력발전 기술개발 현황 및 시장전망’(2011년) 논문에 따르면, 지상은 바람이 빠르지 않고 불규칙적이기 때문에 바람이 제일 좋은 지역에 설치한 풍력발전기도 설계용량기준 30~45%의 전력을 생산하는 데 그친다.
반면 고고도에서는 공기밀도는 낮지만, 바람의 속도가 훨씬 빠르고 일정하다. 그런데 바람에너지는 공기밀도에 비례하고 풍속의 세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고고도의 바람에너지 총량은 지상의 5~8배에 달한다. 실제로 미국 스탠포드대 카네기연구소 켄 칼데이라 교수팀이 2012년 학술지 ‘네이처 기후변화’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바람에너지가 원전 40만 기와 맞먹는 400TW(테라와트, 1TW는 1012W)인 반면, 대기권 전체에서는 최대 1800TW나 됐다.
미국 MIT 출신 엔지니어들이 만든 신생기업 ‘알트 에어로스 에너지스’사는 이처럼 잠재력이 큰 하늘 위의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 헬륨 비행선을 개발했다. 지름 15m의 거대한 원통형 비행선으로, 바람이 통과할 수 있게 뚫린 안쪽 면에는 날개가 3개인 발전기가 달려 있다.
300~600m 상공에 뜬 채로 전력을 생산해 지상국으로 송전한다. 비행선 바깥 면에는 공기역학적으로 설계된 보조날개 4개가 달려 있어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하도록 비행선의 자세를 잡아준다.
필요한 곳으로 쉽게 옮길 수 있고 바로 하늘에 띄워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첫 시제품은 10여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30kW급이고, 현재 200kW급을 개발 중이다.
이 기업은 최근 현장 실험을 끝내고 상용화 초기 작업에 들어갔다. 미국국립과학재단(NSF)은 올해 2월 3일, 알트에어로스 에너지스사에 700만 달러(한화 약 84억 원)의 자금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NSF의 프로그램 매니저 벤 슈라그는 선정 배경에 대해 “쉽게 이동 해 빨리 설치할 수 있고 친환경적으로 풍력발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며 “기존의 풍력발전기가 직면한 문제 다수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구글의 ‘마카니’는 상공을 원형으로 비행하며 발전한다. 프로펠러가 발전기 역할을 한다. - 유튜브 제공
구글도 비슷한 발전기를 개발 중이다. 구글은 2013년 5월, 캘리포니아 소재 ‘마카니 파워’라는 회사를 인수해 구글X의 ‘문샷’ 프로젝트에 편입시켰다. 이 회사에서 개발한 ‘마카니’는 4개 또는 8개의 프로펠러를 단 소형 무인비행기로, 프로펠러에 전력을 공급해 일정 고도에 올려놓으면 바람의 힘만으로 바퀴가 굴러가듯이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회전한다. 이 때 프로펠러의 역할이 모터에서 발전기로 바뀌면서 전기를 생산한다. 바람 속도가 초속 11.5m 이상일 때 600kW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구동부는 하늘을 날지만, 발전기가 지상에 고정된 형식도 있다. 이탈리아 ‘카이트젠’사에서 개발한 연 형태의 발전기가 대표적이다. 길다란 천 양쪽에 줄이 연결돼 있어 실제 모양은 패러글라이더와 비슷하다. 일단 인공바람을 이용해 연을 지상에서 천천히 띄운다. 일정 고도 이상 올라가면 연이 자연바람을 타고 뒤로 훅 날아가는데, 이 때 줄로 연결된 발전기가 실패 풀리듯 돌아가면서 전력을 생산한다. 300m에서 최고 2400m까지 연을 띄울 수 있고, 이 때 3000명 가량이 쓸 수 있는 3MW의 전력이 생산된다.
최대로 풀리면 다시 전기를 이용해 모터를 감는다. 이 때 연이 풀린 경로 그대로 감으면 에너지 손실 때문에 생산량 이상의 전기가 필요하다. 카이트젠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연의 한쪽 끈은 풀고 한쪽 끈을 당겨 연을 바람과 수평한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훨씬 적은 전기로 연을 하강시킬 수 있다. 카이트젠사는 1~2년 안에 상용 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이탈리아의 카이트젠사가 개발한 연 모양의 풍력발전기는 발전기가 지상에 고정돼 있다. 연이 날아갈 때 실패
풀리듯 발전기가 돌아간다. - 카이트젠 제공
섬이나 오지에서 ‘좋아요’
물론 이런 아이디어가 앞으로 살아남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최 연구원은 “시장에서는 기존 발전기에 비해 효율이 좋은지, 설치비가 싼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비슷한 아이디어들이 과거에 경제성 부족으로 상용화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새로운 형태의 풍력발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특히 재생에너지의 핵심인 ‘분산발전’을 실현하려면 누구나 구입해 쉽게 설치할 수 있는 소형 풍력발전기가 필요하다. 알트에어 로스 에너지스의 공동설립자 애덤 레인은 미국의 과학잡지 ‘파퓰러 사이언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기존의 풍력발전기를 대체하려는 게 아니다”라며 “거대한 풍차를 설치할 수 없는 지역까지 풍력발전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연구원도 “제주 근처에 있는 작은 섬들만 하더라도 아직 송전망이 깔려 있지 않아 디젤발전기로 전기를 만든다”며 “섬 마을이나 오지,배 위에서는 최근 나오고 있는 신개념 풍력발전기를 충분히 적용할 만하다”고 말했다.
우아영 기자wooyoo@donga.com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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