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사가 되렵니다"
"건축설계사가 되렵니다"
청진 출신 건축공학도 최림(가명)
"남한 사는 탈북민들 모두 목표 정해 열심히 살고 있어"
남한에 사는 탈북민들은 자신이 정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모두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통일이 된 후 멋진 건축물로 고향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은 청진 출신의 건축공학도 최림(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최림: 사실 북한에 대한 생각은 없었어요. 오직 여기 왔으니까 이젠 여기 사람처럼 여기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대구대표도서관 건출설계 당선작 '온·景(소통하는 풍경)'.
최 씨는 탈북자라고 부르기 보다는 윗동네 사람정도로 봐달라고 말합니다. 남한에 살면서 북한 생각은 할 여유가 없을 정도인데 사람들이 자신을 탈북자로 부르면 불편해진다는 겁니다. 최 씨의 남한생활은 지난 2011년부터 시작됩니다.
최림: 저는 23살에 왔습니다.
기자: 23살에 탈북해서 바로 왔다는 건가요?
최림: 한국에 들어온 나이고 북한에서 떠난 나이입니다.
기자: 보통 그런 경우는 남한에 이미 온 사람이 있어서 불러서 온 경우인데 어떤가요?
최림: 네, 맞아요. 저는 부모님 때문에 왔어요. 제가 혼자 북한에 살다가 부모님 모시려고 장남이니까 한국에 오기로 결심했던 거죠.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정말 먹고 살기 위해 탈북했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자녀교육문제로 또는 불치의 병을 고치기 위해,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자유를 찾아서 등 탈북동기에 대한 다양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이제 부모 봉양이란 말도 듣게 됩니다. 그만큼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의 수도 늘고 다양해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탈북하기 직전 최 씨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림: 일단 본인이 노력한 것만큼 살수 있다. 법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 능력데로 살 수 있다고 알고 있었어요. 북한은 내가 능력이 있어도 체제에 어긋나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노력한만큼 살 수 있다고 오라고 해서 처음에는 선뜻 대답을 못했어요. 왜냐하면 좋은 정보도 있지만 남한에 대한 나쁜 정보도 있으니까 고민을 하다가 두 번째 사람이 왔을 때 마음 먹고 한국에 가자고 결심한거죠. 저는 장사를 했어요. 군대는 못갔어요. 부모님이 당시 문건상 행방불명으로 돼서 군에 입대가 안됐던 거죠.
기자: 그때 북한에서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살만 했나요?
최림: 그때는 열심히 살아보자 노력을 안해도 잘살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장사를 하고 부모님의 도움도 있고 했으니까요. 한국으로 말하면 강남수준은 아니어도 그 사람들 보다 조금 못한 정도로 북한에서의 생활이 좋았습니다.
기자: 북한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 하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남한에 왔다 그렇게 들리네요?
최림: 네, 그렇죠.
동남아 제3국을 경유해 남한에 갔을 때는 북한에서 할 수 없었던 것부터 하기로 맘 먹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최림: 가장 먼저 한 것이 대학을 가겠다고 맘먹고 공부를 했어요. 내가 모르면 취직도 안 되고 하니까 이 사회는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북한에서도 먹고 사는 것은 문제가 없었는데 배우는게 안됐거든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해야겠구나 하는 것을 알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니 대학을 다녀야 한다는 것을 알았죠. 대학입학을 위해 한 3년 준비를 했어요.
기자: 27살에 대학 1학년이 된 거네요. 건축공학은 예전부터 집짓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인가요?
최림: 네, 북한에 있을 때 일했던 것이 건축하는 데라 내 적성에 맞다는 것을 알았고 주위분들이 이 일을 하면 잘하겠다고 조언을 해주시더라고요.
기자: 뭘 했기에 주위분들이 그런 조언을 주신 건가요?
최림: 집짓는 것에 디자인도 그렇고 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제가 그게 다른 분들보다는 좋았나봐요. 전문가들이 저와 일해보자는 말을 자주 했고 그런 분야에서 일했어요.
남한에서 건축공학을 공부합니다. 대학 4년을 다니고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요. 공부는 요령을 피우지 않고 정석대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해가 될까지 노력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최림: 저는 좋았어요. 내가 몰랐던 부분을 많이 알게 됐고요. 현장일을 하면서도 기초를 모르고 했는데 대학에서는 전문지식을 쌓을 수 있으니까 좋았어요.
기자: 대학생활에서 공부하면서 힘든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최림: 가장 힘든 것이 영어죠. 전공이 분야가 다 영어로 수업이 돼있었거든요. 영어 준비가 안돼서 그런 부분이 힘들었어요.
기자: 어떻게 공부하셨어요?
최림: 무작정 외우는 수밖에 없었어요. 기초부터 영어공부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고 그냥 전부 외워서 과정을 이수했어요.
(마이웨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 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번 더 부딪혀 보는거야 때론 큰 산 앞에서 무릎 꿇고서~
힘들 때, 복잡한 머리를 식혀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줬다는 남한가요 입니다. 제목은 마이웨이인데요.
남한생활 10년이 조금 안됐는데 이젠 좀더 구체적으로 건축설계사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기자: 남쪽에 왔기 때문에 달라진 것은 뭔가요?
최림: 첫째도 둘째도 자유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부모님이 먼저 남한에 와서 경제적으로는 도움을 받아 북한에서 잘살았지만 보위부의 감시와 압박이 심했거든요. 뭘해도 꼬투리를 잡고요. 그런데 여기선 말할 수 있고 행동의 자유가 있으니 그것이 가장 좋았어요. 그리고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유튜브
거위의 꿈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모를 비웃음
내 등뒤에 흘린대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edited by kcontents
기자: 변했다면 뭐가 변한 겁니까?
최림:일단 대인관계가 변했어요. 북한에서는 성격상 옳은 것과 아닌 것에 대한 대응이 확실하고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면 상대가 상처받잖아요. 싫어도 웃어줘야 하고요. 예전에는 안되면 안된다고 면전에서 말했는데 여기선 그로인해 사이가 안 좋아질 수 있으니까 가려서 하죠.
대학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하게 될지 아니면 바로 취업을 해서 건축사 설계 사무실에서 현장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 됐든 꿈을 향해 달려가겠다고 했습니다.
최림: 제의 꿈이자 목표는 통일이 됐을 때 내가 설계한 것을 가지고 그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드는 겁니다.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 좀 더 노력하고 공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최림(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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