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면피용 건축심의에 멍드는 건축업계

공무원 면피용 건축심의에 멍드는 건축업계


최대 20개 넘는 심의 통폐합하고 

회의록 투명하게 공개해야

자의적인 심의 기준 문제

심의제도 뒤에 숨어 웃는 공무원들 


   정부가 규제개혁이란 전가의 보도를 칼집에서 뽑았다. 무엇을 벨 것인가. 건축업계에선 건축 인허가 과정에서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온갖 ‘심의제도’부터 베어주기를 앙망하고 있다. 태풍이나 지진 같은 국가 재난이나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공무원이 관련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건축설계 과정에 온갖 심의를 덧붙여 포도송이 다발처럼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건축 인허가는 담당 공무원의 재량에 맡겨졌다. 그러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란 비판이 쏟아지자 외부 전문가에게 그 적절성을 사전 심사하게 한 것이 건축 관련 심의다. 이 건축심의도 처음엔 설계가 적절한지, 원가가 부풀려지진 않았는지, 굴착공사가 이뤄질 때 해당 지반에 문제가 없는지 등 서너 개에 불과했다.


     올해 하반기 서울 강남권에서 분양을 시작할 한 아파트 공사현장.[김도균 기자]


하지만 정부 주도 개발성장 시대가 끝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건축 관련 심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구조와 소방 같은 안전을 강조하는 심의가 생기더니 점차 에너지효율등급인증, 녹색건축인증, 좋은빛 같은 친환경 심의가 더해지고 BF(Barrier Free·장애물 없는 생활환경)인증, 경관심의 또는 도시디자인심의 같은 생활환경과 미관을 중시하는 심의가 덧붙었다. 올해부터는 지하 10m 이상 터파기 공사가 필요한 건축물에 대해선 지하안전영향평가심의가 추가됐다. 2014, 2015년 서울 송파구와 용산구에서 잇따라 발생한 땅꺼짐(싱크홀) 현상을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이들 심의 중 상당수는 내용이 중복된다는 것이다.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지자체)가 저마다 기준을 들이대며 심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모두 이행해야 한다.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인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인건비와 공사비용이 추가로 늘어난다.


20여 건까지 늘어난 건축심의

한국건축가협회 미디어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올해 기준 인허가가 진행되는 공공 및 민간사업의 건축설계에 얼마나 많은 심의(공공기관의 인증 포함)가 필요한지를 살펴봤다. 


먼저 공사비 200억 원 규모의 설계공모에 당선된 공공건축물부터 보자(표1 참조). 지상 2층 건물이라 지하 10m 이상 터파기 공사를 하지 않아 굴토심의나 지하안전영향평가심의가 제외됐지만 받아야 할 심의가 16개나 된다. 건축 규모가 더 커지면 관련 심의가 20개를 훌쩍 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가운데 중복되는 항목이 여럿이다. ‘단가적정성 검토’ ‘원가심사’ ‘일상감사’는 모두 건축비용이 제대로 상정됐는지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다만 심의를 요구하는 기관이 단가적정성 검토는 중앙정부(조달청), 원가심사는 광역자치단체, 일상감사는 기초자치단체로 다를 뿐이다. 특히 현행법상으로는 단가적정성 검토가 이뤄질 경우 원가심사는 생략하게 돼 있지만 해당 지자체가 요구할 경우 들어줄 수밖에 없다. 


 

    서울 시내 한 아파트 공사현장. 이런 대규모 건축 관련 심의가 증가일로에 있어 통폐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아DB]


‘설계 적정성 검토’와 ‘기술심의’도 비슷하다. 전자는 사업기간 2년, 200억 원 이상인 건설공사를 대상으로 설계 내용을 보완·개선하고 현장 적용의 타당성에 대해 조달청에 심의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후자는 100억 원 이상인 건설공사 가운데 해당 지자체가 심의를 요청할 경우 설계의 타당성, 시설물의 안전, 시공기술의 적정성에 대한 심의를 받아야 한다. 


내용의 상당 부분이 겹치는데 타이틀만 다른 심의도 많다. ‘기술심의’와 ‘설계안전성 검토’는 내용이 많이 겹치고 ‘설계적정성 검토’는 ‘BF인증’과 ‘경관심의’에서 살펴보는 내용을 포괄한다.  


비슷비슷한 내용을 중복해 심의 받으면서 건당 소요되는 외주비용을 지불해야 하니 이중과세와 마찬가지. ‘사례 1’의 경우 심의를 한 번 받을 때마다 250만~5000만 원 비용이 들어갔다. 공공건축은 대부분 설계공모를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공모심사 단계에서 상당수 심의를 걸러낼 여지가 있음에도 이중삼중의 심의가 이뤄지기 일쑤다. 공공건축의 경우 발주 주체가 정부기관이라는 점에서 결국 국민의 세금이 낭비되는 셈이다.  


서울시의 경우 일부 프로젝트에 한해 건축심의와 경관심의를 통합해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공사비가 2000억 원 규모인 서울의 한 호텔·업무 복합건축물 사례(표2)를 보면 통합심의가 이뤄져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용은 똑같이 들어간다는 데 문제가 있다. 또 지하 10m 터파기 공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굴토심의와 지하안전영향평가심의를 모두 받았는데 전자가 해당 건물의 안전성, 후자는 주변 건물의 안전성에 대한 심의라는 점에서 역시 통합심의가 가능하다는 지적이 많다. 




규모가 커지면 심의비용도 만만치 않게 늘어난다. 민간사업인 ‘사례2’를 보면 심의·인증이 13개 항목인데 관련 비용만 9억5000만 원이다. 이 비용은 대부분 건축도면과 보고서 작성비용으로, 항목에 따라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이 들어간다. 원래는 발주처가 부담해야 하지만 고스란히 건축사무소에 전가된다. 이는 당연히 건축비 상승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워낙 수주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이 비용을 별도 청구하지 않고 기존 설계비용에서 빼 충당하는 덤핑설계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건축가협회의 설명이다. 꼭 필요한 설계도면을 누락하거나 하청업체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심의비용을 충당한다는 소리다. 결국 과도한 심의가 오히려 부실 설계와 시공을 초래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지고 있다. 


 


자의적인 심의 기준 

건축 관련 심의의 또 다른 문제는 심의위원의 자질과 자의적인 정성평가에 있다. 심의위원은 보통 그 지역 대학 토목·건축 관련 교수들이 맡는데, 개중에는 건축 현장에 대한 정보가 어두운 사람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건축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설계도에 대해 엉뚱한 트집을 잡거나 개인적 취향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기자가 접촉한 건축설계사 10여 명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주변의 고도제한 규정을 지키고자 3개 동으로 나눠 짓기로 합의한 다음 완성한 설계도를 보고 왜 고층짜리 1개 동으로 설계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하는 심의위원을 설득하느라 고생했다.”  


“건축 외부색채가 마음에 안 든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색채로 바꾸라고 하거나, 옥상 2개 층이 미학적으로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통째로 날려버리라면서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 대해선 오불관언의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봤다.” 


“지방대 교수라는 자격지심 때문인지 세계적 건축상을 수상한 해당 건축설계사에게 사소한 것을 트집 잡으면서 ‘당신이 그러고도 건축가냐’라고 호통치는 경우도 봤다.” 


이 때문에 ‘한국의 건축심의는 아마추어가 프로를 심사하는 제도’라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돌고 있다.  


개인적 취향을 강요하는 것은 그래도 순수한 편에 속한다. 까다로운 트집을 잡아 공사 착공을 차일피일 미루게 만드는 심의위원들의 꿍꿍이속을 들여다보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고 건축설계사들은 말한다. 해당 지자체의 암묵적 요구사항을 관철하고자 대신 나서는 대리악역형과 자신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몽니를 부리는 악덕업주형이다.  




대리악역형은 무리한 요구를 철회하는 대가로 이미 공모심사를 통과한 설계에 해당 지자체장의 취향이나 선거공약 이행을 위한 요구사항을 반영해달라 하고, 악덕업주형은 해당 심의위원과 특수관계에 있는 건축하청업체에 일감 몰아주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한다고 한다. 실제 부산·울산지역에서 건축심의위원으로 있던 50대 후반의 대학교수가 외부색채 등 불필요한 지적을 한 뒤 심의 통과 대가로 자신이 실질적 운영자인 색채업체와 용역납품권 체결을 요구한 사실이 들통나 2012년 유죄 판결을 받고 대학에서도 면직된 사례가 있었다.  


건축업계에선 이처럼 전모가 드러나 사법 처리된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익명을 요구한 복수의 건축설계사는 “심의회의가 있기 전 사전 설명을 위해 교수연구실을 방문할 때 대부분 상품권이나 양주를 선물로 챙겨 가는데, 이를 사절하는 교수는 열에 한둘도 보기 힘들다”며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발효된 이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한 건축설계사는 “대학 시절 존경하던 은사님이 건축심의위원 명단에 있어 학교로 찾아뵈었더니 당연하다는 듯 별도의 술자리를 요구해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고도 말했다.



심의제도 뒤에 숨어 웃는 공무원들 

이런 심의회의에는 해당 공무원도 한두 명씩 꼭 참여한다. 공무원들이 불합리한 심의위원을 계속 기용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건축업계에선 “건축심의제도를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활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심의위원들의 배후에 숨어 정치권 입맛에 맞게 설계를 조종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건축 관련 심의가 계속 늘어나는 것도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관련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도록 보호막을 쳐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작동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결국 계속 증대하는 심의 관련 사회적 비용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공무원들의 보신을 위해 민간이 대신 떠안는 비용이라는 설명이 된다. 박근혜 정부 시절 건축 관련 심의를 대폭 줄이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심의가 더 늘어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심의제도가 무분별하게 남발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담당 공무원의 자질 부족도 꼽힌다. 공공건축의 설계공모가 이뤄질 때 그 건축에 대해 어떤 심의가 필요한지 공모지침서가 발표된다. 그런데 이를 작성하는 공무원이 건축에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보니 기존 공모지침서 내용을 무작정 복사해 옮기는 일이 허다하다. 나중에 문제가 될 여지를 없애고자 관련 법규나 비용을 꼼꼼히 따지지 않고 관련 심의를 망라한다는 것.  


더구나 설계공모 당선작에 대해 꼭 필요한 심의만 받으려 하면 공무원들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 봐 “한번 공문서화된 것을 뒤바꿀 수 없으므로 공모지침서에 적힌 모든 심의를 받아야 한다”고 나오는 것도 문제다. 건축설계사로선 담당 공무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불필요한 심의까지 모두 받느라 돈과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건축설계사는 대부분 건축심의제도의 필요성을 적극 인정한다. 건축설계는 단순히 건축물을 짓는 행위로만 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도·전기·통신·도로 같은 무수한 망으로 이뤄진 네트워크의 집결을 감안해야 하고 주변 건축물과 조화, 미학적 경관도 고려해야 한다. 또 해당 건축물에 거주하는 사람의 건강과 환경 문제까지 종합적으로 고심해야 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도시일수록 이런 과정은 더욱 복잡 미묘할 수밖에 없다. 건축설계사를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견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건축심의는 이런 오케스트레이션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지휘자의 실수는 하룻밤 많아야 수천 명의 관객을 실망시키는 데 그치지만, 건축설계사의 실수는 도시환경을 저해하고 수많은 주민의 일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책임감이 막중할 수밖에 없다.  


건축업계는 이렇게 긴요한 건축심의를 효율적으로 진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면서 건축생태계의 건강은 유지할 수 있도록 정부 기관별 중복심의를 막고 유사한 심의를 통폐합해 아무리 많아도 10개 이상이 넘지 않도록 상한제를 실시해달라는 주문이다.  


부산의 김승남 일신건축 대표는 “중복된 심의를 통폐합하고, 주관적 판단과 개인적 기호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 심의 기준을 최대한 객관화하며, 현재의 심의 회의록을 실명으로 공개해 투명화할 필요가 있다”고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한은주 소프트아키텍쳐랩 소장은 “정부가 나서 설계계약을 체결할 때 인허가 과정에서 필요한 심의비용은 설계비용과 별도로 처리할 수 있게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심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공개적이고 투명한 심의지침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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