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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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2018.09.03
필자가 강사로 있는 문화센터 수강생들에게 요즘 왜 글이 ‘안 나오는지?’ 물으면 답이 엇비슷합니다. “경험이 부족해서요.” 푸념은 이어집니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뭘 좀 알아야잖아요.” “가방끈이 짧아서, 어쩌고저쩌고….” 귀엽게 둘러대는 애교성 핑계도 있습니다. “팔을 다쳤거든요.” 멀쩡한 신체를 훼손하거나, “컴퓨터가 말을 안 들어요.” 애먼 기계를 망가뜨리기도 합니다.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가 생각납니다. 배고픈 여우가 포도송이를 찾아냈으나 너무 높은 가지에 매달려 따 먹을 수가 없었다지요. 여우가 그 자리를 떠나면서 중얼거리는 말이라니.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자기 능력이 모자라 일이 제대로 안 풀리면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손에 넣을 가치가 없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속인 사례입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사막여우가 현자의 이미지라면,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는 훨씬 보통 사람을 닮았습니다.성인도 둘러대기에 합류하는군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포교를 시작할 무렵 사람들은 기적을 보여 달라고 졸랐습니다. 성화에 견디다 못한 무함마드가 산을 향해 세 번 외칩니다. “산아 이리 오너라!” 그러나 말귀 어두운 산은 꿈쩍도 안 합니다. 원래 산이 말이 없기도 하지만요. 순발력 있는 무함마드가 당황함을 감추며 둘러댑니다. “알라는 참으로 자비로우시다. 만약 내 말대로 산이 우리에게로 왔다면 모두 깔려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산에 올라가 그분께 감사해야겠다.” 이 일화에서 비롯한 숙어가 ‘산이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갈 수밖에’입니다.이런저런 핑계가 있을 수 있지만 3가지엔 핑계가 있을 수 없다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시험과 골프, 그리고 글쓰기. “간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졌어요.”(시험), “어젯밤 우연히 잠을 설쳐서 컨디션이 안 좋다고. ”(골프), “요새 말이야, 세월이 수상해서 도통 쓸 거리가 없다니까.”(글쓰기). 마지막 글 문제에 관한 한 할 말이 있습니다. 글이 안 써지면, 왜 글이 안 써지는지, 왜 세상 돌아가는 것이 하수상한지 그것을 글로 쓰면 됩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있으니 그 해결책은 나를 향한 항변, 아니 나를 위한 위로인지도 모르겠군요.알면서도 속아주고 싶은 핑계도 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핑계! 핑계는 사랑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핑계라도 댈 수 있는 때가 좋은 때인지도 모르지요. 핑계를 댄다는 것은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지는 않으려는 '가녀린', 아니 '처절한' 몸부림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노력이 대개 허사로 그쳐 유감스럽긴 하지만. ‘미운 우리 새끼’ 김건모의 레게 <핑계>가 들려오는군요.“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이렇게 쉽게 니가 날 떠날 줄은 몰랐어/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슬픈 사랑을 가르쳐준다며 넌 핑계를 대고 있어 예~ 예~”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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