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현실 혼동한 脫원전… 일본도 원전 하나둘 다시 돌린다"
산업과학 Construction,Science/에 너 지 Energy2018. 8. 26. 08:52
"영화와 현실 혼동한 脫원전… 일본도 원전 하나둘 다시 돌린다"
여론조사 '국민 71% 원전 찬성'
김학노 원자력학회장의 생각은
"자동차나 항공기는 위험하지 않나? 불이 나 사람이 죽고, 댐이 무너지면 물난리가 난다. 문명엔 위험이 내재돼 있다. 무섭다고 피할 수만은 없다. 원자력발전도 위험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문제다."
한국원자력학회 김학노(62) 회장은 괴로운 표정이었다. 우리 원자력 60년 역사상 지난 1년은 가장 참담했다. 정부는 원자력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탈(脫)원전 공약을 집행했다. 지난 6월엔 멀쩡한 월성 1호기를 조기 폐쇄했고 새 원전 건설은 백지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1년 임기를 마치고 이달 말 퇴임하는 김 회장은 "올여름 폭염에 전력난이 우려되자 원전 정비 기간을 줄이고 가동을 늘린 게 이 정부의 자기모순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김학노 원자력학회장//대전=신현종 기자
원자력학회는 이달 초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원자력발전에 대한 인식 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71.6%가 원전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데 찬성했다. 반대는 26%였다. 원전 찬성은 보수·진보 같은 이념 성향과 관계없이 일관됐다. 지난 21일 대전에서 만난 김 회장은 "팩트(사실)를 제대로 알리면 국민이 바르게 판단한다는 믿음을 얻었다"며 "신재생에너지 확대엔 동의하지만 전기 수요 예측은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원자력에 호의적이었나.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두 분은 인수위 3개월을 거치면서 전문가들을 만나 에너지 문제의 현실을 파악했다. 이상에 치우친 공약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이번 정부는 공약이 곧장 정책으로 들어와버렸다."
―원전이 위험하지 않은가?
"원자력 기술은 핵무기에서 나왔다. 태생부터 멍에를 쓰고 있다. 방사선은 위험하다. 하지만 가속기와 브레이크, 핸들로 자동차를 운전하듯이 원전도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 정해진 수명은 없다. 이젠 60~80년까지 쓸 수 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생중계처럼 보면서 공포가 과장된 게 문제다."
―영화 '판도라'를 보았는지.
"오류를 확인하려고 봤다. 현실에서는 영화 같은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원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폭발은 핵폭발이 아니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본 수증기에 불과하다. 냉각이 잘 안 돼 수소 농도가 높아졌고 발화돼 분출된 것이다. 국내 원자로들에는 수소 폭발을 막는 장치를 추가로 설치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판도라'를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 하는데,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탈원전에 대한 지지가 높았던 것 같다."
―'원전 마피아'란 말이 귀에 박혀 있다.
"전문가들이 반성해야 한다. '원전 마피아'라는 프레임에 가두면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나왔으니까. 성적서 위조, 납품 비리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신고리 5·6호기는 시민 참여단이 '건설 계속' 결정을 내렸다. 공론화에는 전문가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는 에너지 빈국이다. '원자력은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라며 이승만 대통령이 씨앗을 뿌린 원자력은 정부의 후원, 나쁘게 말하면 비호를 받아 성장했다. 전문가들이 자만에 빠져 국민과의 소통을 소홀히 해 받은 벌이다."
―지난해 말 발표된 8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 대해 '대선 공약 이행을 위한 비현실적 목표 제시'라고 비판했는데.
"에너지는 수요 예측이 가장 중요하다. 8차 계획은 7차 계획보다 수요를 낮춰 잡았다. 그런데 겨울과 여름에 어떤 일이 벌어졌나? 전력 공급 예비율은 6%대로 떨어졌고, 전력을 많이 쓰는 기업체들엔 '손실을 보전해줄 테니 공장 가동을 줄여달라'는 요청을 했다. 전력 예비율은 10% 여유가 있어야 안전하다."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을 지난해 6.2%에서 2030년엔 20%까지 늘릴 계획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빅데이터, 전기차 등 에너지 수요는 훨씬 커질 거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시들하면 어떡하나. 원자력이나 석탄이 아니라면 LNG에 의존해야 하는데, 화석연료는 유한하고 가격이 출렁인다. 전기차를 늘리겠다면서 싸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은 축소하겠다니, 이율배반 아닌가?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을 올스톱시켰다가 하나둘씩 살려내 쓰고 있다. '60년 뒤 원전 제로'를 밀어붙이면 국내 원자력 산업은 붕괴한다."
―후폭풍이 어느 정도인가.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한다.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으니까. 원전 설계사, 핵연료 제조사는 일감이 떨어졌다. 연구 의욕도 없고 졸지에 미래가 없는 분야가 돼버렸다."
―학회 회원이 5000명인데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나.
"신재생에너지를 더 활용해야 한다는 데 다들 동의한다. 단, 에너지 정책은 나라마다 처한 상황을 따져봐야 한다. 넓은 땅에 햇볕이 짱짱한 미국은 태양광 발전이 좋다. 북해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독일이라면 풍력을 선택할 수 있다. 한국은 태양광이나 풍력이나 한계가 뚜렷하다. 백두대간을 비롯해 환경 파괴도 불가피하다. 물론 원자력은 방사성 폐기물이 문제다. 경중을 가려 '전력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해야 한다."
―정부에 바란다면.
"세상은 거꾸로 가지 않는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전기에너지를 맛본 이상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순 없다. 전력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다. 원자력은 석탄이나 LNG, 태양광이나 풍력보다 온실가스나 미세 먼지를 적게 배출한다.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고 기후변화에도 대응하는 에너지 정책의 수정을 기대한다."
사회 대전=박돈규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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