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할로윈, 우리들의 동지(冬至) [김수종]


www.freecolumn.co.kr

그들의 할로윈, 우리들의 동지(冬至)

2017.10.30

내일, 즉 10월 31일은 할로윈(Halloween) 날입니다. 30여 년 전 일인데 할로윈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신문기자를 하면서도 30대 초반까지 할로윈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신문지면에 나오긴 했겠지만 개념을 모르니 마음에 새겨두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1980년대 초 유아원 나이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로스앤젤레스로 일하러 갔습니다. 

10월 중순이 지났을 때였는데, 아이들 입에서 가끔 “할로윈”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도 못 하면서 말입니다. 미국 생활에 익숙한 사진기자 동료가 놀러 가자며 밴에 두 집 식구들을 태우고 베이커스필드라는 농장지대로 갔습니다. 
넓은 호박 밭이 있었고 이파리가 떨어진 호박 덩굴에는 축구공만 한 노란 호박이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드넓은 호박 밭에는 어른과 아이들이 호박을 안아보기도 하고 따서 바구니에 담는 등 난리를 쳤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까만 마귀 모자를 썼습니다. 사진 기자는 이 모습을 열심히 찍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호박 밭 풍경이 생경했는지 기껏해야 호박을 세어보고 만지는 정도였습니다. 돌아올 때 호박 몇 개를 안고 온 게 그렇게 신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할로윈’이라는 말을 자주 했고 저녁만 되면 마귀할멈 복장을 한 여자가 나오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10월 말이 되자 동네 아이들이 오면 쵸콜릿 같은 선물을 주어야 한다며 엄마에게 졸라댔습니다.
드디어 할로윈 저녁이 되자 애들 인기척이 들리더니 현관문을 두드리며 “트릭오트릿”(trick or treat)이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쵸콜릿 봉지를 주자 애들은 얼른 받아들고 떠들며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신문 방송에는 미국 여러 곳에서 할로윈 과자를 어린이들이 먹고 중독이 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그 몇 해 전에 미국에서는 할로윈 사탕을 먹고 어린이가 죽는 일까지 생겨서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해마다 할로윈이 되면 우리 아이들도 마귀 모자를 쓰고 동네 애들과 어울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받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아이들은 커 가면서 할로윈이 즐거운 행사가 아니라 스트레스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로윈 때 입을 복장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 문화에 익숙지 않은 한국 아이들과 엄마는 복장 종류 선택과 가격에 신경이 곤두서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할로윈의 뿌리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사는 켈트족의 가을수확 축제와 기독교 신앙이 융합된 민속 행사로 차차 기독교를 신봉하는 여러 나라로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즉 복장은 켈트족의 유령에서 나왔고, 그날은 성자와 순교자들의 영혼뿐 아니라 온갖 잡귀도 출몰한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귀신을 달래고 액운을 내쫓는 민속인 셈입니다.

그런데 신대륙발견으로 기독교를 따라 미국에 건너간 할로윈이 소비문화가 극도로 번창한 오늘날 돈벌이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할로윈이 가까워지면 백화점과 쇼핑몰은 물론 시골 가게에도 할로윈 광고가 쏟아지고 할인 판매행사가 벌어집니다. 

사실 미국에서는 할로윈 날부터 연말까지 쇼핑 시즌으로 굳어졌습니다. 즉 10월 말의 할로윈에 이어 11월 말의 추수감사절, 12월 말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긴 홀리데이시즌이 되며, 이 기간 중 매출을 놓고 경제동향이 점쳐지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할로윈이 한국으로 건너와 난리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 준수되는 민속적인 본령은 온데간데없고, 주로 쇼핑과 파티를 부추기는 상업성이 곳곳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25일 네이버에 뜬 상품만 13만 건이 넘었습니다.
해외여행의 보편화, 조기 유학붐, 조기 영어교육,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로 해외 문물이 순식간에 한국에서 유행합니다. 할로윈도 그런 영향으로 퍼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해외문화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쏠림현상도 한몫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엄마들은 할로윈 파티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친구들 복장과 할로윈 선물을 비교하는 아이들의 성향 때문에 부모들의 지출도 많지만 물품을 선택하는 일이 큰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할로윈 복장을 사주는 데 100만 원이 들고, 할로윈 선물 쿠키 상자 마련하는 데 10만 원이 들었다고도 합니다. 특히 영어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엄마들은 유치원의 특성상 할로윈 파티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애들이 기죽지 않게 한다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복장과 선물을 챙길 수밖에 없다고 하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할로윈이 이렇게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극성을 부리는 것은 한국사회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라는 아이들이 우리 문화의 뿌리가 없는 할로윈에 너무 경도되는 것도, 또한 부모들이 할로윈 파티에 너무 돈을 쓰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허영(虛榮)의 시장입니다.  

할로윈에 견줄만한 한국의 민속은 무엇이 있을까요? 동지(冬至)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귀신이 많이 돌아다녀서 이를 쫓기 위해 팥죽을 끓여 먹는 것이 할로윈과 닮은 점인 것 같습니다. 
올해 동지에는 식당마다 색다른 팥죽파티 등 다양한 동지 축제로 어린이도 기분 좋고 어른도 흐뭇한 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동지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여전히 눌려버릴 건가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