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마다 꽃 되니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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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마다 꽃 되니

2017.10.11

긴 추석연휴에 좋은 말을 많이 만났습니다. 사람들과의 대화가 아니라 책과 글을 통해 알게 된 것들입니다. 대표적인 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의 “모든 잎이 꽃이 되어가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는 말입니다. 

고교 동문 카톡방에서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좀 의아했습니다. 감성과 정서가 동양적이고 한시의 세계에 닿은 듯한데 카뮈의 말이라니 의외였습니다. 알고 보니 가을만 되면 사람들이 읊조려온 명구로, 업소의 간판을 이 말로 만들어 내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라는 것도 있습니다. 어떻게 말하는 게 더 나은 것일까. 아니, 카뮈의 말은 정확하게 어떻게 돼 있으며 어디에 처음 나온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가을이 되자 올해에도 어김없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가짜 ‘윤동주 시’가 나돌아 이것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영어로는 “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라고 돼 있더군요.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어입니다(카뮈는 “그렇다. 나에게는 조국이 하나 있다: 프랑스 말.” 이런 글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독할 능력이 없어 프랑스 전문가에게 부탁했더니 “L’automne est un deuxi?me printemps o? chaque feuille est une fleur.(가을은 모든 잎이 꽃인 두 번째 봄이다)”로 돼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영어와 똑같았습니다. 

독일어로는 “Der Herbst ist ein zweiter Fr?hling, wo jedes Blatt zur Bl?te wird.” 이렇게 돼 있더군요. 영어 프랑스어와 뚜렷하게 다른 점은 ‘모든 잎’이라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all이 아니라 every, each의 개념으로 잎이 꽃이 되는 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가을은 잎마다(또는 각각의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 번역이 훨씬 좋습니다. ‘모든 잎’이라는 획일성과 전체성에서 벗어나 잎에 독자성과 개별성을 부여하는 게 더 옳고 바른 것 같습니다.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시 ‘안개 속에서(Im Nebel)’에도 all이 아니라 each와 every의 뜻을 담은 Jeder(각자, 저마다)가 나옵니다. “기이하여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모든 나무 덤불과 돌이 외롭다/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보지 못한다/누구든 혼자이다.” 이렇게 번역(전영애)돼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모든 나무 덤불과 돌이 아니라 각각의 나무 덤불과 돌이 맞습니다. 모두가 혼자인 게 아니라 누구든 혼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은 그렇다 치고 카뮈가 어디에서 한 말인지 출전을 알 수 없었습니다. 여러 사이트를 검색해 봐도 카뮈의 말이라고만 기록돼 있었습니다. 가장 유력한 것은 그가 스물두 살이던 1935년 5월부터 교통사고로 숨지기 며칠 전인 1959년 12월까지 쓴 ‘작가수첩’입니다. 그래서 국내에 번역된 ‘작가수첩’ 세 권을 다 훑었지만 이 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폐결핵 재발로 각혈을 하던 카뮈가 29세 때인 1942년 가을, 요양하러 간 중남불의 도시 샹봉-쉬르-리뇽에서 쓴 글입니다. “가을에 이 풍경은 잎새들의 꽃을 피운다. 벚나무는 온통 붉게 물들고 단풍나무는 누렇게 물들고 너도밤나무는 청동빛으로 뒤덮인다. 고원 전체가 또 한 번 봄의 수많은 불꽃으로 뒤덮인다.” 그보다 좀 뒤에 쓴 글은 이렇습니다. “하늘이 파랗기 때문에 강가에서 싸늘한 물 위로 아주 낮게 하얀 가지들을 뻗고 있는 눈 덮인 나무들이 마치 꽃 핀 편도나무들 같다. 이 고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항상 봄과 가을을 혼동하게 만든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알 수 없어 이만 포기할까 하는데 다른 프랑스 전문가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카뮈가 1944년에 발표한 3막 희곡 ‘오해’에 이 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극중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는 모녀는 손님들을 살해하고 돈과 귀중품을 빼앗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오자 모녀는 이번에도 살해해 바다에 던지는데, 알고 보니 20여 년 전 집을 나간 아들이었습니다. 저주받은 운명에 어머니는 바다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여동생도 죽기 위해 여인숙으로 돌아가면서 작품이 마무리됩니다. 

이 희곡에서 여동생 마르타가 가을이 뭐냐고 묻자 오빠 장이 “모든 잎이 꽃과 같은 두 번째 봄”(“Un deuxi?me printemps, o? toutes les feuilles sont comme des fleurs.”)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A second spring, when the leaves are like flowers.”입니다.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대사(臺詞)는 그 뒤 약간 변형돼 가을과 봄에 관한 유명한 수사(修辭)가 되었습니다. 

원전을 찾는 동안 “글을 쓰는 것은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했던 카뮈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작가수첩’에는 감성과 성찰이 빛나는 에스프리가 많습니다. 
-나의 직업은 책을 쓰는 일과 나의 가족, 나의 민족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 싸우는 일이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작가다. 내가 아니라 붓이 생각하고 기억하고 혹은 발견한다. 
-다시 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더 빨리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서인 것이다. 못된 버릇이다. 다시 시작할 것.
-산다는 것은 확인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느끼는 바를 남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은 것으로 옮겨 놓는 기술이다. 처음 얼마동안은 우연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재능이 우연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천재의 뿌리에는 행운의 몫이 없지 않다. 

카뮈는 너무 일찍(1957년 44세 때) 노벨문학상을 받아서인지 “모든 완성은 속박이다. 그것은 더 높은 완성을 강요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가 더 살았더라면 어떤 글을 썼을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사람이든 천재는 죽을 때 죽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카뮈의 그 글을 나는 “잎마다 꽃 되니 가을은 두 번째 봄”, 이렇게 줄이고 싶습니다. ‘꽃 되니’가 좋을지 ‘꽃이 되니’가 좋을지 고심했지만 역시 토씨가 없는 게 나아 보입니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슨 글이든 원전을 중시해야 하며 출전을 밝혀 알게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저작물에 대한 존중이며 표절에 대한 경계입니다. 카톡으로, 이메일로, 문자메시지로 매일같이 유포·전파되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말, 멋진 문장 중에는 엉터리나 가짜가 아주 많습니다. 멋지고 좋은 말이라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니 이건 나 자신의 고질적인 병통이겠지만 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게스트칼럼 / 이정원

‘고2 엄마’와 추석 차례

가치관은 규범, 도덕, 윤리, 의식, 습관, 생활양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가치관은 동서양이나 국가, 종교, 종족, 성별 등에 따라 다를 수 있고 협의로는 지역, 가문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동양의 유교적 사상과 법도에 따라 혼례, 제례 등에서 가문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하찮은 형식과 순서를 두고도 남의 집 잔치 상에 “감 놔라, 배 놔라”하며 반갑지 않은 참견을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걸 이제까지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저는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서 제례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합니다. 어려서부터 “홍동백서” 좌포우혜“의 형식에 물든 나머지 과거 아버지께서 생존해 계실 때 제사를 지내면 음식을 놓는 순서와 제례 순서, 술잔을 올릴 때는 ‘초헌’ ‘아헌’ ‘종헌’ 때문에  걱정도 많이 들었습니다.

엊그제 추석을 맞았습니다. 한데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제례의 예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내외는 불교를 믿는데 아들 내외는 교회에 나갑니다. 기독교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냥 일상에 먹는 대로 차려 놓고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저는 원래 막내여서 제사 걱정은 안 했는데 과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들이 없는 막내 숙부님께 70세가 되어서 양자를 갔습니다. 막내숙부님은 유교를 신봉하셨기 때문에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줄 후손으로 나를 양자로 입적하셨고 그래서 바늘에 실 가듯이 손자에게 계속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줄 것을 생전에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양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제 석 달 되었습니다. 첫 번째 맞는 추석 차례입니다.

나는 나이가 80이고 아내도 75세로 둘 다 나이를 먹고, 거기다가 나는 어지럼증으로, 아내는 골 협착증으로 구부리거나 오래 걷는 데 심한 불편을 겪어 제사를 모시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아들 내외에게 우리 대신 추석 차례를 지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기독교를 믿지만 아들 내외는 제사에 대해서는 효도의 한 형식이라고 생각하고 평소에 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제사 준비를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한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들 집에서 차례를 지내기로 약속했는데 저녁에 제물을 전부 가지고 올라와서 하는 말이 당분간 아버지 댁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와 아내는 황당하여 “무슨 말이냐? 엄마가 아파서 우리 집에서는 못 지낸다고 했쟎냐? 갑자기 이러면 어떻게 하니?” 하고 역정을 냈더니 아들 얘기가 자기 집에서는 못 지내겠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짐작컨대 며느리가 반대를 한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고2와 중2인 손자 형제가 있는데 “고2 엄마로서는 아이들 뒤치다꺼리와 직장 출근 때문에 앞으로 한 5년간은 저희 집에서는 제례를 올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단호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이때 문득 생각났습니다. “아! 이게 요즘 말하는 강남 아줌마들의 고2, 고3 엄마”라는 특권이자 핑계(?)로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요 몇 년 새 언론을 보면 ‘고3 엄마’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고3을 둔 엄마들은 아무도 제사를 안 지낸다더냐? 네 시누이도 고2 중3 딸을 뒀는데도 차례도 지내고 제사도 지내지 않느냐? 올 추석 차례 안 지낼 테니 당장 나가”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그러면 아들과 며느리가 항복을 하고 한 발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허사였습니다. 죽어도 막내가 대학 들어갈 때까지는 제사를 제 집에서는 못 지내겠다고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아들 내외는 둘 다 대학교수를 하는 맞벌이 부부입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집안 내력과 유교적 가치관을 모를 리가 없는 인텔리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니 조상보다는 자식과 가정이 먼저인 모양입니다. 우리 집에 와서는 차례를 지내도 저희들 집에서는 아이들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시위였습니다. 그게 이유의 전부였습니다. 조상보다는 자식과 남편이 먼저인 새로운 세태를 미처 모른 뒷방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는 부끄러움에 우리 내외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나는 머리끝까지 치솟는 화를 참을 수 없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당장 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아들 내외는 제물을 놔둔 채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더니 현관문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들네는 바로 한 아파트에 삽니다. 우리 내외는 닭 쫓던 개 모양으로 아들 내외가 사라진 현관문을 야속하게 쳐다보다 아내와 함께 제물을 냉장고에 옮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추석날 아침 아내는 양아버지 차례를 안 지내겠다는 나를 달래면서 제상을 펴놓고 제물을 진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 이기는 시어머니 없다더니 바로 그 현실을 체험한 것입니다. 어쩝니까, 아들과 며느리에게 지고 만 것입니다. 나는 부모 말을 거역하는 50대의 아들 내외가 괘씸하여 양아버지께 제주를 올리며 분한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이다음 우리 내외도 제사 밥 얻어먹기는 다 틀렸다는 생각을 하니 이렇게 빠르게  변해가는 세대 차이와 가치관을 눈치 채지 못하는 내가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기는 여론조사 뉴스를 보니 추석이나 설날 차례를 안 지내겠다는 사람이 거의 절반이나 되며 그 시간에 여행을 가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난다고 합니다. 현실론이 전통적 관례마저 압도하는 대변혁이 오고 있음을 이렇게 늦게야 깨닫는 걸 보니 확실히 “구닥다리 꼰대”가 맞는 거 같습니다. 제례는 미신을 초월한 효의 상징으로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미풍양속인데 이 전통과 가치가 과연 계속 전승되어갈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쑥스러운 모습으로 차례에 참석한 아들 내외에게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이다음 너희들도 나와 똑같이 네 아들에게 당해 보라”고.

추석을 지내고 막 음복을 하는데 친한 친구한테서 카톡이 왔습니다. “조상 모시는 추석은 이미 쌍놈이 됐고 연휴 즐기는 추석으로 방향을 틀었네. 애들한테 끌려 가족여행 중인데 세대 차이를 많이 느끼고 있음. 구닥다리 늙은이가 된 듯… 나는 불교, 아이들은 기독교… 차례 잘 모시게 ㅎㅎ”(2017.10.6)

필자소개

이정원

시조시인. 1939년 충남 예산 출생.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고대신문 편집국장 역임. 공직에서 정년퇴임. 2005년 계간 ‘현대시조’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한국시조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 강남지부 회원. 현대시조 ‘좋은작품상’ 등 수상. 시조집으로 ‘얼레와 어금니’ 등 3권과 산문집 '코드 55'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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