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는 지금도 즐겁지 않다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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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지금도 즐겁지 않다

2017.09.19

“담배 있어요?” 

강의실로 내려오면서 앞자리에 앉은 필자와 주변 학생에게 느닷없이 담배 있냐고, 있으면 한 개비 얻어 피우자고 말한 것이 그분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필자는 당시 금연 중이어서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건네준 담배를 피우면서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담배 피우고 싶은 사람은 피워도 돼요. 여학생들도 피워도 돼요. 난 여자들이 담배 피우는 걸 보면, 왠지 섹시해 보이더라.”라고 말하던 그분을 보면서 처음에는 ‘뭐, 이런…’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복학을 하고 학점이라는 것을 좀 챙겨야겠다는 마음으로, 당시 시험 걱정이 없고 학점도 비교적 후하게 준다는 마광수 교수의 ‘세계문학’이라는 교양과목을 신청해서 들었는데 너무나 파격적인 그분의 행동에 적응하기 힘들어 ‘그냥, 수강 취소를 해버릴까?’ 하는 고민이 30분 정도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런 고민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시작되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자매인 샬럿 브론테의 자전적 소설인 <제인 에어>까지 그 흔한 노트나 강의 자료 없이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시공을 넘나들며 문학사를 논하는 모습은, 파리한 그분의 모습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할 만큼 멋있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 분야에 대한 확신이 그분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분의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문학에 녹아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  물론 그분의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은 성 본능과 관련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은 문학에 문외한이었던 필자의 이해 수준을 높여 주었습니다. 좋은 강의는 수강생들에게 생각의 틀을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강의가 진행될수록 그 틀을 업그레이드시켜줍니다. 마광수 교수의 강의가 그랬습니다. 

강의 중 <데카메론>에 대한 마광수 교수의 표현이 기억에 남습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데카메론을 읽으면 부모님이 ‘아, 우리 아들이 기특하게 고전을 읽는구나’ 하시며 좋아하시겠지만, 사실 데카메론은 포르노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단히 외설적인 소설이에요. 단지 이 소설이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엄혹했던 중세에 사람의 희로애락을 담았기 때문이에요.” 이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마광수 교수는 자신의 생각을 매우 거침없이 표현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문학은 인간의 욕망을 언어를 빌려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욕망이 형이상학이든 형이하학이든 그분은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계문학은 시험이 없는 과목이었습니다. 단지, 학기말에 소설을 하나 써서 제출하는 것이 유일한 테스트였습니다. “여러분, 시험 치는 것 싫잖아요? 시험 대신에 소설을 하나 써서 제출하는데 길이는 적당히 알아서 쓰시되 매우 선정적이고 원색적인 그러니까 거의 포르노다 싶은 소설을 써 오세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있으면 아주 좋고 표현과 묘사가 매우 세밀해야 합니다. 채점의 기준은 내가 그 소설을 읽을 때 흥분하게 되면 A입니다.” 그 과목을 수강했던 모든 학생들은 그 내용이 포르노가 됐든 어설픈 삼류 애정 소설이 됐든 소위 ‘소설’이라는 것을 써보게 됩니다. 필자 역시 A학점을 따려고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 마광수 교수님을 흥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수업 시간에 그분이 얘기했던 성적 취향을 맞춰드리기 위해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의 여성을 등장시켰으며, 그분이 좋아하는 동료 교수님을 슈퍼맨처럼 등장시키고 매우 고혹적인 처녀귀신도 등장시켰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 교수님은 제가 제출한 소설이 마음에 드셨던 것 같습니다. 원하는 학점을 받았고 더 재미있는 것은 제가 제출한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가 후에 출간한 그분의 소설 속에 녹아 있었습니다. 물론 저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마광수 교수를 추락하게 만든 소설이 <즐거운 사라>였습니다. 소설 속의 사라는 즐거웠는데, 마 교수는 이 소설로 즐겁지 않은 필화를 겪고 이로 인해 그분의 삶 자체가 무너졌습니다. 그분은 ‘그 암울하던 중세에도 인간 본성을 탐구한 <데카메론>이 쓰였는데 20세기 말 우리나라에 <즐거운 사라>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고많은 낱말 중에 ‘즐거운’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자는 ‘성(性) = 즐거운 것’이라는 도식을 완성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성의 해방’을 통해 가면을 쓰고 사는 엄숙한 척하는 부조리한 성적(性的) 지배세력에 대한 반발심리가 깔려 있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말하기 좋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고 실상 그분이 ‘즐거운’이라는 낱말을 쓴 이유는 사라가 즐겁기를 바랐기 때문일 겁니다. 사라가 즐거울 수가 있어야 그분의 삶도 즐거운 세상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사라가 즐겁게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홍글씨를 씌워 그분을 옥죄고 그분의 사유(思惟)를 가둬놓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 세상이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요? 속옷인지 겉옷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옷을 입은 고등학생 나이의 여자아이들이 가부키(歌舞伎) 화장을 하고 아이돌이라는 이름으로 TV와 인터넷 매체에 나와 성행위를 연상케하는 동작을 댄스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한류라 부르며 면죄부를 주고 있는데 <즐거운 사라>는 마녀사냥을 당했습니다. 커밍아웃을 해서 외면을 받았던 게이 연예인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까지 등장하며 왕성하게 다시 활동하는데 <즐거운 사라>는 다시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성 상납을 받은 지도층, 혼외자 논란을 빚은 고위층 문제는 심심하면 터져 나오고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경미한 비난만 받다가 잊히는데 <즐거운 사라>는 세상의 비난과 원죄를 뒤집어쓰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용인되고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 모습이 마광수 교수가 꿈꿨던 ‘성적 해방’의 모습은 아닐 겁니다. 그분이 성적 해방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것은 휴머니즘이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마광수 교수의 자유로운 생각에 100%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분의 자유에의 갈망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가혹하게 죗값 이상으로 개인을 비난하고 그 비난에 가수요가 붙어 존재를 부인하는 파괴적 야만성에 쉽게 도달하는 비정상적인 경도현상을 매우 깊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그분이 법정에서 했던 발언을 다시 짚어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성 문제는 마치 쓰레기통에 뚜껑만 덮어 놓고 있는 양상입니다. 높으신 분들, 하느님 찾는 분들, 엘리트님들이 낮에는 근엄한 목소리로 마광수 죽여라 해놓고 밤에는 룸살롱에 갑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12뉴스 진행

게스트칼럼 / 이승훈

기자의 윤리와 책임

요즘 인터넷 공간은 240번 버스와 관련된 이야기로 연일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240번 버스를 타고 가던 모녀 중 일곱 살 난 딸이 먼저 내린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어머니가 버스가 출발한 이후 도중하차를 요구했지만 미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기사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버스를 세웠다는 것이 사건의 요지입니다.

문제는 당시 상황을 목격했다는 한 네티즌이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 이 사건을 네 살 아기가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도중에 내려 달라며 울며 사정하는 아기 엄마의 부탁을 버스 기사가 무시하면서 고집스럽게 다음 정거장에 하차하게 했고, 내리는 아기 엄마에게 욕설을 했다는 식으로 침소봉대하여 올렸고, 이 글을 본 여러 네티즌들이 분개하여 SNS를 통해 공유하면서 시작됩니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진행되는 전형적인 인터넷 인민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해당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고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도 올라가는 등 큰 화제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해당 버스 기사는 악마와 같은 존재로 매도당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당시 상황이 담긴 CCTV가 공개되고 해당 기사는 큰 잘못 없이 자신의 본분을 수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억울했던 정황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서울시와 경찰이 사실 확인에 나서 CCTV 녹화를 점검한 결과 건대역 정거장에 진입한 버스에서는 승객 10명과 사건의 실마리가 된 여자아이가 내렸고 버스는 곧바로 정거장을 빠져나가 이미 2차선으로 진입한 상태였습니다. 안전상 아이 어머니를 내려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며칠 동안 보이지 않는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매도당하고 욕설을 들은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트라우마는 평범한 소시민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컸을 듯합니다.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했을 뿐인데 대중으로부터 크나큰 모욕과 상처를 받게 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물론 사건을 침소봉대해서 올렸던 네티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책임은 SNS상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명확한 사실 확인이나 제대로 된 취재도 없이 기사화해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기자에게 있다고 봅니다.

[단독]이라는 제목이 붙었던 최초 보도를 보면 대부분의 문장이 ‘~이라고 말했다. ~이라고 주장했다.’라는 식의 인용으로 끝나 있습니다. 이는 후에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더라도 기자는 책임이 없다는 회피의 장치로 보입니다. 결국 해당 사건이 사회적 쟁점이 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해당 기자를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황, 즉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상황이 다시 한 번 벌어진 겁니다.

정확한 확인 없는 기사로 인해 많은 평범한 이들이 억울한 일을 겪거나 심한 경우 생계 수단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그동안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멀게는 삼양라면의 공업용 소기름 사건이나 만두 파동 때의 자투리 무 사건이 있었고 최근에는 카스텔라 업계 자체를 시장에서 퇴출시키다시피 한 식용유 카스텔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어릴 적 읽었던 ‘꼬마 기자’라는 동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친구의 집이 건설업체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처한 상황을 막기 위해 주인공인 소년이 해당 정황을 기사로 써서 기자인 아버지에게 신문에 실어 줄 것을 부탁하자 ‘한쪽 이야기만 듣고 쓴 기사는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사화할 수 없다.’며 아들을 타이르는 대목입니다.

SNS의 발달로 정보 공유의 속도가 매우 빠른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일반인이 커뮤니티에 글을 올릴 때도 여러 번 생각하고 올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보다 큰 책임과 의무를 가진 기자가 전문성이 없는 일반인이 올린 SNS 이야기를 명확한 사실 확인 없이 기사화해서 애먼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행위는 단순한 무책임이 아니라 기자라는 직업의 핵심적인 사회적 역할을 포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필자소개

이승훈

1979년 서울 태생. 단국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2008년 한맥 문학으로 문인 등단. 한국문인협회 치과의사문인협회 회원. 현재 오마이뉴스에 ‘치과에서 바라본 세상’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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