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책 읽기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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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책 읽기

2017.09.01

좀 색다른 책 읽기를 감상(?)했습니다. 책은 원래 조용한 골방에서 혼자 읽는 것쯤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한여름 방학이나 휴가철이라면 한적하고 시원한 시골 원두막도 괜찮겠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독서 방식을 새롭게 경험했습니다.

지난 주말 서울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였습니다. 행사장인 디지털도서관 입구 포스터에 박완서의 단편 ‘환각의 나비’를 주제로 한 ‘낭독공연’이라고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홍보자료에는 ‘음악 선율과 몸짓으로 만나는 박완서’라는 문구도 보였습니다. 책을 혼자서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마치 영화나 연극을 감상하듯 보고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서관 행사 담당자는 “여러분은 그냥 한 시간 정도 편안히 앉아서 보고 들으면 책 한 권을 절로 읽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호기심 속에 행사장(공연장?) 조명이 꺼지고 낭독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전면 큰 스크린 가득히 흑백의 스틸 영상이 펼쳐집니다. 그 위로 소설의 구절구절이 물 흐르듯 떠올랐다가 사라집니다. 영상과 소설 구절에 조화로운 음악을 곁들이니 마치 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갑자기 조명이 환하게 무대를 밝히며 울려퍼지는 피아노 배경음악. 곧이어 희고 검은 복색의 여성 두 사람이 등장하며 환각의 나비를 주제로 읊조리듯 노래합니다. 맑고 고운 음색으로 주고받는 이중창이 이어지더니 곧 할머니와 청년 복색의 남녀가 가세합니다. 남녀 4중창의 아름다운 하머니가 공연장을 가득 채웁니다.   

“춤을 추는 나비처럼 울며 웃으며 살아가리. 꽃을 만난 나비처럼 꿈꾸듯이 살아가리.”

음악이 잦아들고 낭랑한 여성의 소설 낭독이 이어집니다. 피아노 반주가 때로 꿈꾸듯 몽환적으로, 때로 노도처럼 격하게 울려 낭독 소리마저 파묻히고 맙니다. 아, 책을 미리 읽지 않고선 모든 대목을 생생히 알아들을 수는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습니다. 남성으로 이어지는 낭독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낭독 중간 중간 중요한 대목에서 남녀 연기자가 명확하고도 감성에 넘치는 목소리로 소설 속의 대화를 생생하게 재현해 들려줍니다. 그들의 열연에 마치 책을 붙들고 깜박 졸다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듭니다. 

2006년에 발표된 ‘환각의 나비’는 이미 많은 독자와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걸작 단편입니다. 아마도 우리 가슴속 깊이 묻혀 있던 부모자식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 우리 가정과 사회가 안고 있는 치매라는 숙제에 대한 고민과 안타까움을 극적으로 풀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작가 스스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했답니다. 

청상과부로 하숙을 치며 힘겹게 세 아이를 키워내고 치매를 앓게 된 어머니. 어렵게 자라 박사 학위를 따고 지방대학 교수가 된 맏딸 영주. 집 나간 지 반년 만에 꼭 어머니가 옛적에 살았을 법한 허름한 절집에서 승복을 입고 딸 같은 여승과 평화로이 지내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지만 영주는 선뜻 다가가지 못합니다. 마침내 평안을 찾아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 현실 속의 딸 영주는 환각 속의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깁니다.  

“춤을 추는 나비처럼 울며 웃으며 살아가리. 꽃을 만난 나비처럼 꿈꾸듯이 살아가리.”

낭독공연은 독자(관중)의 마음을 흔드는 남녀 4중창의 청아한 메아리로 끝납니다. 독자(관중)들의 우레 같은 박수가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주고 또 주어도 성이 차지 않아 미안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주고 싶어도 더 줄 것이 없어 미안한 어머니도 있습니다. 반면 받아도 받아도 부족하고 미흡하다 불평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는 고맙지만 제 살기에 바빠 어머니가 성가신 자식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머니처럼 되어서야 비로소 그 어머니의 애달픈 생을 가늠할 수 있겠지요. 

박완서는 전쟁 통에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다섯 남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일흔이 넘어 발표한 ‘환각의 나비’에서 하고 싶었던 작가의 말은 이렇게 새로운 낭독공연이라는 형태로 독자들의 가슴에 새롭게 감흥을 불어넣었습니다. 낭독공연팀 숲아트와 음악감독 김길려 씨가 참여한 이번 공연은 음악적인 요소를 크게 강화함으로써 여느 낭독회보다 더 강렬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한 편의 음악극이라고나 할까? 공연이 끝났을 때엔 한 권의 책을 이렇게 종합예술로 실감나게 읽는 방법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낭독공연은 지난달에 이어 국립중앙도서관이 두 번째로 개최한 행사입니다. 디지털도서관의 100석이 넘는 대회의실에는 빈자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담당자는 독자들(?)의 호응이 대단해서 인터넷 신청이 불과 이틀 만에 마감되었다고 말했습니다. 

2015년 통계로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 평균 독서량은 10권도 채 못 됩니다. 그나마 학교에 다닐 연령인 13~19세가 15권 정도로 가장 많은 편입니다. 연령이 올라갈수록 독서량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이번 행사의 참석자는 젊은이들도 많았지만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꽤 많았습니다. 전국 각급 도서관들이 이 같은 낭독공연 행사를 활발히 전개해서 학교를 떠나면서 책과도 멀어지는 사람들에게 독서 열의를 고취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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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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