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창생 정섭이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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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동창생 정섭이

2017.08.21

해마다 모내기가 끝날 무렵이면 고향 초등학교에서 ‘동문체육대회’라는 걸 개최합니다. 모교를 졸업한 동문들이 모여서 씨름이며, 달리기, 윷놀이나 배구, 축구 등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날입니다. 명분은 체육대회지만 속내는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끼리 웃고 즐기며 하루를 보내는 날이라는 쪽에 더 의미를 두고 있는 날입니다. 

저는 해마다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문안을 씁니다. 저희 동창들은 검정고무신, 옥수수빵 등의 단어로 향수를 자극하는 편지를 보낸 덕분인지 참석률이 좋습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체육대회는 주관 기수들이 졸업횟수별 천막과 의자 등을 준비해 놓습니다.
졸업연도가 빠른 기수일수록 천막 밑은 썰렁합니다. 아예 비어 있는 기수도 있고, 서너 명이 앉아서 개회식이 열리기 전에 막걸릿잔을 주고받는 풍경도 낯설지 않습니다. 

내리쬐는 햇볕에 아랑곳없이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기수들은 주로 50대 미만입니다. 60세가 넘은 동문들은 참석만 해도 경품을 주는 윷놀이나 줄다리기 등에 참여를 해서, 경품으로 받은 우산이며 하이타이 등을 들고 아이들처럼 웃으며 즐거워합니다. 

체육대회도 해마다 열리지만, 참여하는 얼굴도 해마다 변하지 않습니다. 늘 그 얼굴에, 그 이름이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젖히다가 몇 잔 술에 시뻘개진 얼굴로 추억을 늘어놓습니다. 대부분 지난해에도 했던 말을 올해 다시 해도 정겹게 들리고 웃음이 나는 까닭은 머리카락은 반백이 되고 얼굴은 주름살투성이지만 목소리에 초등학교 시절의 동심이 숨어 있기 때문 일겁니다.

모교가 산골 면소재지에 있다 보니 중학교 교복을 입은 동창은 20%가 채 안 될 정도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면 열세 살 많게는 열여덟 살도 있습니다. 열세 살 어린나이도 몸에 맞는 지게를 맞춰서 지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거나, 서울이나 대전 부산 등지로 나가서 공장이나 상회의 점원, 중국음식점 배달원 등으로 객지 생활을 시작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일찍 대처로 나간 동창들이 택시운전사며, 공장의 기술자, 슈퍼 주인 등으로 끼니 걱정 없이 살 때 고향을 지키는 동창들은 죽지 못해 농사를 지었습니다. 사정이 바뀐 것은 포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부지런한 동창은 연수익 일억 원을 우습게 알고 증권투자로 몇억 원을 까먹었다는 경험을 웃으며 털어 내고, 해마다 땅을 늘린 덕분에 몸만 움직이면 먹고사는 걱정은 일찌감치 접어 둘 정도입니다.

올해 ‘정섭’이라는 동창이 체육대회에는 처음으로 나타났습니다. 대구에서 섬유공장을 한다는 그 동창은 운전사가 달린 고급승용차를 타고 왔습니다. 객지에 뿌리를 내린 동창들은 모두 정섭이를 에워쌌습니다. 고향을 지키는 동창들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올해 포도 가격 동향이며 무슨 농약을 쳐야 하나로 고민하는 얼굴들이었습니다. 

다들 정섭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동창 모임에 나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 장례식에 정섭이는 문상을 왔었습니다.

정섭이는 3년 늦게 입학을 한 까닭에 저보다 나이가 3살 많습니다. 저는 7살에 입학을 했고, 그는 10살에 입학을 해서 1학년 때부터 덩치가 컸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은 낡은 구두를 잘라서 만든 슬리퍼를 신고 다니셨습니다. 그 까닭에 멀리서도 구두 뒤축이 복도를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시절 제가 다닌 초등학교 1학년들은 책상과 의자가 없어서 교실바 닥에 앉아 수업을 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기성회비도 못 내는 놈이 수업시간에 존다며 슬리퍼를 신은 발로 정섭이의 얼굴을 차버렸습니다. 정섭의 귀가 찢어졌는지 귀 밑으로 피가 줄줄 흘렀습니다. 정섭이는 재색 민소매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어깨로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놀란 정섭의 엉덩이를 다시 발로 차면서 나가서 씻고 오라고 호령하셨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정섭이를 따라서 우물가로 갔습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는 동안 정섭이는 쑥을 입으로 씹고 있었습니다. 피를 닦아낸 귀 밑의 상처에 잘게 씹은 쑥을 붙이며 정섭이는 약국집 아들은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졸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훨씬 나중에는 정섭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담임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정섭이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당시 정섭은 대구에서 수건 공장의 염색기술자로 일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섭이는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영정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함께 모여 앉아 있던 동창들은 정섭의 까닭 모를 슬픔이 전이되어 오는 것을 느끼며 지켜봤습니다. 
정섭이는 동창들이 따라 주는 술 한 잔을 달게 마시고 일어섰습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며 동생과 어머니가 살고 있는 본가에도 들르지 않고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었습니다.

정섭이는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한 대구사투리로 골프를 치러 필리핀이나 베트남, 말레이시아를 자주 다닌다는 등, 승용차를 이번에 외국산으로 바꾸는 통에 몇억 원의 돈이 들어갔다는 등 객지 동창들에게는 꿈같은 말로 시선을 잡아끌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총무를 불러서 동창들끼리 밥이나 한번 먹으라면서 50만 원을 내놓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섭이는 동창들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부러움이 넘치던 눈빛으로 정섭이를 바라보던 동창들은 운전기사가 가져온 딸 결혼식 청첩장을 한 장씩 받아 쥔 후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는 카센터를 하는 동창이 "우리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정섭이 잔치에 참석하자, 빠지면 벌금 십만 원씩이다"라고 너스레를 떠는 통에 풀렸습니다. 하지만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몇몇 친구들은 콧방귀를 끼며 먼 하늘을 바라보거나 시선을 외면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을 결혼식 하객용쯤으로만 생각하는 정섭이 얼굴에서 격세지감을 느끼는 얼굴들이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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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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