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타르다리의 뛰어내림꾼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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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타르다리의 뛰어내림꾼

2017.08.09

동유럽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수도 사라예보 다음으로 유명한 관광지는 모스타르(Mostar)입니다. 그곳의 상징은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오래된 다리라는 뜻), 즉 모스타르다리입니다. 네레트바강 양안의 기독교지역과 이슬람지역을 연결하는 아치형 석조 다리는 폭 5m, 길이 30m, 높이 24m 규모로,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착공 9년 만인 1566년에 준공한 세계적 명소입니다. 

스타리 모스트는 보스니아 내륙 산악지대의 풍부한 은(銀)과, 달마티아의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의 수송은 물론 강 양안 사람들의 소통과 교류를 매개해왔습니다. 유럽을 휩쓴 여러 번의 전쟁 속에서도 건재했던 다리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인 1993년 9월 11일 기독교인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 포병대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초대 대통령 티토(1892~1980)가 죽자 유고슬라비아 중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가 공화국으로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 40%, 세르비아정교 31%, 가톨릭 15%, 신교 14%로, 분리되지 못한 채 갈등이 깊어져 1990년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민족과 종교적 갈등이 중첩된 ‘인종 청소’ 내전은 킬링필드의 재현이었고, 이 기간에 25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교류와 소통의 다리는 단절과 증오의 다리가 되었습니다. 나라 곳곳에서 그때 숨진 사람들의 무덤이 눈에 띕니다. 모스타르 시내의 건물과 아파트 벽에는 지금도 총탄 자국이 무수히 남아 있습니다. 다리 앞에는 ‘Don’t forget 1993’이라고 쓰인 돌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게 다리가 파괴된 지 6년 만인 1999년 재건 움직임이 시작돼 EU의 감시 하에 위원회가 설립되고, 유네스코의 주도로 세계 여러 나라가 참여한 복원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세계은행 등이 지원하고, 오스만의 기술을 갖춘 터키 회사가 재건을 맡고, 헝가리의 육군 잠수원들이 강물에 떨어진 옛 다리의 돌을 건져 올려 2004년 7월 23일 다리는 드디어 재개통됐습니다. 

교류와 소통에서, 단절과 증오를 거쳐, 국제적 협력과 민족적 종교적 화해의 상징으로 거듭난 다리는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를 보기 위해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들고 있습니다. 다리는 여유 있게 걷거나 멈추어 사진을 찍기 어려울 만큼 관광객이 많습니다. 대리석 바닥이 반들반들해 넘어지지 않도록 곳곳에 턱이 조성돼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이쪽과 저쪽의 풍광이 일변합니다. 

스타리 모스트에는 이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받고 강물로 뛰어내리는 사람들입니다. 지난달 하순 그곳에 갔을 때 수영팬티만 입은 남자가 다리 난간에 드러누워 배를 문지르고 있었는데, 바로 그런 사람들이 다이빙꾼입니다. 한국 관광객이 많아 “안녕하세요?” 하고 우리말로 인사를 한 그 사람은 이미 50대로 보였고, 만난 적은 없지만 ‘그리스인 조르바’ 비슷한 인상이었습니다.

한 번 떨어지고 받는(사실은 떨어지기 전에 받는) 값은 50유로(한화 6만5,000원 상당)라고 들었는데, 주로 한국인들이 많이 돈을 거두어 뛰어내려 보라고 한답니다. 그러나 귀국 후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훑어보니 어떤 사람은 15유로(1만9,500원), 어떤 사람은 25유로(3만2,500원)를 받더라고 써 놓아 정확한 액수를 알기 어렵습니다. 내가 그날 본 다이버는 수영팬티 차림으로 다리는 물론 상점가를 활보하며 자신을 떨어지게 만들어줄 사람들을 찾았지만 소득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 일에도 박리다매(薄利多賣) 떨이가 있는 것인지 경쟁이 심한 것 같고, 다이버의 연령이나 다이빙 폼과 솜씨에 따라 요금이 다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부터 이걸 생업으로 삼았을까. 취재할 시간이 없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매년 7월 마지막 일요일, 다리에서는 전통의 다이빙대회가 열립니다. 올해에도 1만여 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7월 31일(현지시간) 41명이 참가한 대회가 열렸습니다. 유튜브로 살펴보니 저마다 개성 있는 폼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볼만 했습니다. 어떤 기사에 올해 행사가 451회째라고 돼 있던데, 사실이라면 1566년 다리가 준공된 이후 한 해도 빠짐없이 계속된 행사인 셈입니다. 잘 믿기지 않습니다. 

전쟁은 폐허를 만들고, 폐허는 전쟁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폐허는 무너져 내리려는 힘과 무너지지 않으려는 힘의 길항(拮抗)과 긴장을 통해 인간의 삶과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리 주변에는 전쟁관광(하루 30유로) 포스터가 많았습니다. 포스터에도 총탄 자국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전쟁의 참상과 그 기억은 이제 사업과 관광상품으로 변했습니다. 

다리 위의 다이버들이 그 일만 하고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눈이 내리거나 강에 얼음이 얼면 뛰어내릴 수 없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도 삶은 계속됩니다. 직업적인 뛰어내림꾼이든 누구든 이 다리 주변의 주민이든 관광객이든 모든 삶은 오래된 다리를 복원한 '화해와 협력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라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검은낭아초 (장미과) Potentilla palustris (L.) Scop.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한 지 72주년이 되는 
8.15 광복절이 다가옵니다. 
광복절은 기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남북 분단의 슬픔도  
함께 기억해야만 하는 날입니다. 
남북 분단으로 말미암아 우리 식물도감에는 실려 있는 우리 꽃이지만
북한에만 자생하므로 만나볼 수 없는 꽃도 많습니다.
    
이러한 북방계 식물을 만나보기 위해서는 
연변, 연해주 또는 사할린 등 
북한 주변국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재작년 사할린 들꽃 탐사에 이어 
올해도 사할린과 쿠릴열도 꽃 탐사를 다녀왔습니다.
사할린을 가는 데에는 약 3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약 한 시간 소요되는 
쿠릴열도의 쿠르시나 섬을 가는 데에는 절차도 복잡하고
경비행기가 운행되기 때문에 기상 조건에 매우 민감합니다.
따라서 운항 시간표대로 운행되지 않아 예측이 어려운 곳입니다.
    
이번 사할린과 쿠릴열도 탐방에서 북한에서만 자생하거나
남한에도 있지만, 고산지 등 극히 한정된 지역에서만 자라는
여러 종의 북방계 식물을 만났습니다.
이번에 만난 검은낭아초도 그런 꽃 중의 하나입니다.
   
검은낭아초는 고산 습지에 사는 다년초로서 
백두산 식물탐사 때 만난 적이 있는 풀꽃입니다.
꽃은 한여름에 검은 자줏빛으로 1개 또는 몇 개가 
줄기 또는 가지 끝에서 취산꽃차례로 핍니다.
꽃잎은 꽃받침보다 작고 열매가 익을 때까지 꽃잎이 남아 있습니다.
    
습지의 풀숲에서 진한 자줏빛으로 눈길을 끄는 검은낭아초,
자세히 살펴보면 진한 흑장미의 요염함이 숨어 있는
앙증맞게 작지만 깜찍하고 매혹적인 꽃입니다.
    
우리나라 북부지방에 자생하며 러시아(사할린, 쿠릴), 
일본, 중국(동북부), 유럽, 북미 등지에 분포합니다.
    
(2017. 8. 5. 쿠릴열도 쿠나시르 섬에서)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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