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는다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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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는다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

2017.08.08

“모래시계의 모래가 용서 없이 흘러내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이것이 종말기(終末期) 환자가 놓여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환자에게 의사로서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나의 수명, 나의 시간입니다. 나의 말과 마음입니다. 영양주사 등 무의미한 연명조치(延命措置)가 아닙니다."

이런 엄숙한 자세로 4천 명이 넘는 환자 임종을 경험한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쇠약해진다는 것이 아니고 성숙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그에 상응한 종말이 약속되어야 합니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일본인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 重明) 박사는 보석 같은 이런 훌륭한 말을 남기고 지난달 그의 화려한 106세의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평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의 임종을 도와 드렸으니 자기는 몇 백 살 되는 인생을 살아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2020년의 도쿄(東京) 올림픽도 보고 110세까지는 살고 싶다고 내비친 적도 있는 그가 떠난 것입니다. 

평생을 내과 현역 의사로 도쿄의 ‘성누가국제병원(聖路加國際病院)’에서 근무한 그는,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2년 병원 개축공사 때 520상(床) 전 병실을 개실(個室)로 만들고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병원 로비와 복도에 산소공급 배선을 하는 등 대대적인 시설 혁신을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시설이 3년 뒤 예기치 않은 돌발 재난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1995년 3월, 도쿄 도심 지하철 안에서 종교단체 ‘옴 진리교’ 신도들이 신경가스 사린을 살포하여 13명이 사망하고 6천3백여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많은 종합병원이 병실 부족으로 환자를 수용 못하는 중, 히노하라 박사의 병원은 640명을 응급수용 치료하여 사태 수습에 크게 이바지해 일본 사회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히노하라 박사는 성누가병원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부속 간호대학의 학장까지 맡은 뒤 65세에 정년 퇴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사로서 병원의 경영에 참가하고 72세 때에는 동양인 최초로 국제내과학회 회장을 맡었습니다. 그는 , 80세 때는 성누가병원 병원장직을 4년간 봉사활동으로 맡는 등, 현역 의사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깊은 인연을 가진 병원이었지만, 히노하라 박사는 금년 초부터 건강이 나빠지면서 그의 마지막 길로 떠나는 장소로 병원이 아니라 자택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병원장에게 고통을 완화하는 진료 외에는 아무런 연명조치도 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평소 그의 지론대로 존엄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불교나 일본 전통 신도(神道)의 신자인 일본에서, 1세기도 더 되는 메이지(明治)시대에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히노하라 박사는 평생을 의학을 통한 봉사활동으로 일관했습니다.

교토(京都)대학 의학부 졸업 후, 주위의 충고를 무시하고 도쿄로 진출, 성공회의 성누가국제병원 내과의로 취직한 것이 1941년, 일본이 미국 등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해입니다. 당시는 도쿄대학 의학부 출신이 아니면 도쿄 지역 관·공립 병원에서 타지역 대학 출신 의사가 견뎌내기 힘들었던 학벌전성시대였습니다. 대학 재학 시 폐결핵으로 1년 휴학한 적이 있는 그는 다행히 현역 군복무는 면했습니다.

전후 미국 유학으로 미국의 현대의학을 배운 히노하라는 그때까지 독일 의학이 주류를 이뤘던 일본 의학계에 대혁신의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현재의 의사 ‘레지던트‘제도 도입을 비롯하여 예방의학 등 많은 개혁을 선도하였습니다. 당뇨, 고혈압 등 성인병을 ‘생활습관병’으로 호칭하게 된 것도 그의 주창에 따른 것입니다. 

공인(公人)으로서의 활동 외에, 히노하라 박사의 개인적 활약도 실로 초인간적이고 다재다능하였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의학 칼럼을 연재하고 300권에 가까운 단행본을 냈습니다. 건강할 때에는 1주일에 평균 2회 정도의 강연을 했으며, 그의 수첩에는 2년 뒤 강연 예약까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2001년에 낸 ‘현명하게 사는 법’은 1년 반 만에 120만부가 팔렸습니다. 출근 도중 자동차 안이나 지방 가는 기차 안에서도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2002년 91세 때 시작한 아사히(朝日)신문의 ‘있는 대로 걸어간다‘ 제목의 주간 칼럼은 타계하기 10일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어릴 때 배운 피아노연주는 준(準)프로 수준으로 어린이를 위한 오페라도 제작했고, 음악요법(音樂療法) 분야에서도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친분이 두터워진 일본에서 활동 중인 테너 가수 배재철 씨는 히노하라 박사의 장례식에서 박사 작곡의 노래를 불러 명복을 빌었습니다. 

1일의 영양섭취량을 1300kcal로 정해 소식을 한 박사는 90세 때는 병원 이사장실이 있는 5층까지 지하주차장에서 143계단을 걸어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건강할 때 하루 수면시간은 5시간이고 아침 식사 전 15분간의 체조를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히노하라 박사는 1970년 3월의 일본 적군파(赤軍派) 항공기 납치사건 인질의 한 사람입니다. 평양에 가는 도중 김포공항에 불시착한 항공기 속에서 3박4일 범인과 같이 지낸 뒤 석방된 이 사건은 59세의 히노하라 박사의 인생철학을 크게 바꾸었습니다. 

“비행기 납치사건에서 생환하여, 사람의 생명이란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지구(地球)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구나 라고 실감했습니다.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거기서부터의 앞날 인생을 나 자신보다도 오히려 타인의 편이 되어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2000년 그의 나이 89세 때, 히노하라 박사는 75세 이상 되는 노인을 상대로 ‘신노인의회’라는 모임 조직을 제창하여 전국 순회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서일본 도시 구마모토(熊本)의 지인 초대로 그곳에서 열리는 박사의 강연회에 초청을 받아 우리 부부는 어느 가을 주말 구마모토를 방문했습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 공회당 무대 뒤 사무실에서 잠시 박사와의 만남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보도를 통해 박사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저는 이 강연회를 통해 그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높이고, 이어 방문한 도쿄 근처의 지인 권유로 박사의 저서도 여러 권 샀습니다. 

자기 집을 인생 종말의 장소로 선택한 박사는 연명을 위한 치료를 일절 거부하고 호흡부전(呼吸不全)으로 조용히 운명하였습니다. 일본 황실 황후(皇后)를 포함한 4천여 명의 조문객이 저세상으로 떠나는 그를 배웅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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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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