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비정한 도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적개심이 끓어오른다. 분노가 치민다고 하지 않고 굳이 ‘적개심’이라고 하는 데는 모종의 계급갈등 같은 것이 거기 숨어있는 듯해서다. 


출근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저편에서 달려오는 승용차가 속도 줄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럭 겁이 나서 걸음을 빨리하는데 달려오던 차는 거의 내 엉덩이를 스치듯 달아 뺀다. 이 겨울에 무슨 선글라스를 한 여성이다. 이런 일에서는 어찌나 남녀가 평등한지! 입에서 온갖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고, 내가 ‘600만불의 사나이’(이런 70년대식 비유를 용서하시길)라도 된다면 쫓아가서 차 보닛을 우그러뜨리고 싶을 정도다.


도로는 오늘도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아직도 정의감이 삭지 않았는지 나는 이런 도로의 일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도로만큼 권력관계가 뚜렷한 공간이 없는데 말이다. 그곳의 최상위 권력층이 외제차라는 건 누구나 안다. 언터처블, 아무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다. 국산 소형차가 잘못 스치기라도 하면 차를 통째로 팔아도 대가를 치를 수가 없다. 자동차들은 이렇게 가격과 크기에 따라 도로를 우선적으로 점유하고 이용할 권리를 보장받는다. 성능 좋고 비싼 차들은 그 가치로 말미암아 도로에서 언제나 주행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도로의 권력은 외제차-대형차-소형차·경차로 내려간다. 하지만 아무리 경차라 해도 도로 위에서는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다. 부딪히면 사람만 손해다. 인사 사고만 아니라면 보험이 그 알량한 권력을 다 보장해주니 겁날 게 없다. 


 

출처 나래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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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의 무법자들을 대할 때마다 단지 개인의 공공의식의 희박을 탓하고 말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만 좋으면 다 돼!”라는 이 사회의 이기심과 탐욕이 좀 더 쉽게 용인되는 장소일 뿐인 것을. 타인을 맘대로 밀어붙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타인의 권리와 존엄을 짓밟아도 제지받지 않는다. “차를 운전하는 동안만큼은 내가 강자야! 비루하게 주춤거리는 저 보행자는 내 앞길을 성가시게 하는 걸림돌일 뿐.”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에서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숫자상의 ‘점’으로 보는 현대인의 공감 부재를 지적했거니와, 도로 위의 일상적 폭력 역시 성과와 효율만을 최고로 치는 이 사회의 업보가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사실 자동차는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에 부담을 안기는 행위이다. 도로를 사통팔달 닦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쓰고, 막대한 에너지와 자원을 쏟아부으며, 소음과 분진을 사방에 날리고, 심지어 매일 인명을 살상한다. 그러나 거대화된 도시에서 어쨌든 먹고살기 위해서는 장거리 이동을 피할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여전히 불편하기 짝이 없는 대중교통만을 이용하라고 강변하기도 어렵다. 대중교통이 아예 들어가지 않는 지역도 허다하며, 한밤중에 갑자기 가족이 아프면 또 차가 요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일상적으로 차를 쓰는 건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기껏 그 차를 몰고 나와 봐야 만성 정체로 그다지 효용도 없다. 에어컨을 빵빵 돌리느라 실외로 더운 공기를 쏟아내는 사람들은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거리에 나섰을 때 더 후덥지근한 공기를 견뎌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에어컨 회사는 또 이 탁한 공기를 이길 수 있는 더 크고 좋은 신제품이 나왔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문명의 이기라는 게 대충 다 비슷하다. 처음에는 획기적 기술력과 놀라운 편의성에 감탄하지만, 그 물건이 포화되면 ‘정체 현상’을 일으켜서 그것이 없을 때보다 오히려 더 불편해진다. 그 사이 우리는 그 물건들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 없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빠진다.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던 여름 더위를 우리는 이제 잠시도 참지 못하게 되었다.


자동차, 에어컨 같은 이기들이 지구환경과 자연을 망가뜨리고, 자원을 고갈시키고, 공공의 세금을 탕진하는 건 오히려 작은 문제다. 생산과 소비가 넘쳐날수록 인간 존재의 가능성은 점점 말라붙는다. 아주 작은 것들, 아주 거친 것들을 가지고도 충분히 삶을 꾸려갈 수 있었던 능력은 사라지고, 그런 조야함과 불편함 속에서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천착할 수 있었던 우리들의 영혼은 시들어버린다. 


효율과 속도를 앞세우는 사회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인간을 상실한다. 입장이 바뀌면 모두가 한낱 점으로 추락할 뿐이다. 사회정의란 무슨 거창한 차원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타인을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보는 ‘사회적 감수성’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이 마음 놓고 걸어도 되는 도로 위에서부터 말이다. 

경향신무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2052044005&code=990100#csidx05acd44ba4b7fbdb474a29c9280e6a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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