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뜨락에서 봄을 보다.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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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뜨락에서 봄을 보다.

2017.02.06

그제가 입춘(立春)이었습니다. 설처럼 24절기 또한 음력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지만 왠지 음력 같지 않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며칠 전 동료 필진 한 분의 칼럼에서 절기는 양력이라고 일러 주기 전에는 저도 확실히 몰랐습니다. 그렇다는 걸 알고 나니 선인들이 참 지혜로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낮 동안 해를 보고 농사일을 하려면 사시사철 해의 움직임에 맞춰야 하는 게 맞는 거죠. 절기에 맞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도 일과 삶이 하나로 노래에 녹아있는 지혜의 보고입니다. 요즘도 우리 조상이 쌓아온 이런 지혜의 전통을 학교에서 가르치는지 모를 일입니다. 

농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입춘을 맞이할 때마다 저는 좀 어정쩡한 기분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날씨가 여전히 매서운데 입춘은 무슨 입춘이람?’ 하고 볼멘소리를 하곤 했지요. 한편으론 ‘아, 그렇다면 봄이 저만치 다가와 있다는 게지’ 하고 마음이 놓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려나 음력 정초가 엊그제였으니 입춘이 이처럼 빨리 왔다는 사실이 쉬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긴 날씨로만 본다면 이곳 제주는 말 그대로 입춘이지요. 입춘 날은 산중에서도 저녁까지 10도를 상회하였습니다.

입춘이 지나면 곧 우수(雨水)를 맞이하게 됩니다. 절기가 바뀌다 보면 계절이 따라서 바뀌죠.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또 여름, 가을이 오고 . . . 그렇게 계절은 끊임없이 순환을 계속합니다. 계절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문다면 삶이 얼마나 따분하겠습니까?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 산다는 건 또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요즘 날씨가 포근하여 바깥 뜰에 나가 보니 지난 추위에 꽃망울이 움츠러든 홍매화가 다시 봄 기운을 타고 화사한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언덕진 곳에 조성한 매화 밭을 지나면 어린 매화꽃 향기가 코끝에 아련합니다. 꽃이 좀 더 커지면 몇 송이라도 찻잔에 띄워보리라 마음먹습니다.

우리 뜰에서 겨울의 총아(寵兒)는 하귤(夏橘)입니다. 밤새 영하 가까이 떨어진 추위에도 굳은 껍질을 하고 탄탄히 몸을 지켜낸 하귤이 여간 대견하지 않습니다. 보통 귤은 겨울에 익고 겨울에 따서 겨울에 먹지만 하귤은 크기도 보통 귤과는 확연히 다르거니와 익는 시기도 다릅니다. 겨우내 익어서 3월에서 5월 사이에 따 먹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관상용으로 많이 키우는데 과일은 너무 시다고 그대로 먹지 않고 주스로 짜거나 절여 놓았다가 한여름에 시원하게 해서 마십니다. 우리는 하귤이 생김새나 맛이 자몽과 비슷해서 자몽 먹듯이 반으로 잘라서 아침 식사에 곁들여 먹습니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걸 모두 세어보니, 여름의 태풍과 겨울의 온갖 간난을 겪고도 서른 개정도는 수확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작년까지는 바깥에서 얻어왔지만 올해부터는 집 마당에서 키운 것으로 먹게 되니 생각만 해도 입맛이 다셔집니다.

이렇듯 관상용으로도 좋고 먹어서도 좋아 우리는 하귤 나무를 상당히 아끼는 편입니다. 연전에어린 나무를 열 그루 넘게 사서 곳곳에 심은 게 지금은 제법 의젓합니다. 1미터 채 안 되는 작고여린 나무가 무슨 힘으로 저렇게 많은 열매들을 달고 있는지 신기하기도 합니다. 직경이 7, 8센티미터나 되는 노란 여름 귤은 색깔과 모양만으로도 겨울을 무색하게 하지요. 창밖에 보이는작은 나무 한 그루에는 아홉 개가 열렸었는데 그중 두 개는 어느 날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일곱 개가 달려 있으니 보기에 풍성하고 탐스럽지만 마치 어린 여자가 아기를 품은 듯하여 안쓰럽기도 합니다. 2미터 이상의 큰 나무도 여섯 그루나 심었는데 두 그루는 지난해 동해(凍害)로 죽었습니다. 더 잘 보살폈더라면 죽진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립니다. 

늦가을에 낙엽을 다 떨궈낸 단풍나무들은 윗부분의 작은 가지들에 물이 올라 온통 바알간 빛을띠고 있습니다. 생명의 모습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삭막하기만 하던 가지에 물을 빨아올려 잎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이들도 어김없이 봄을 감지하는 것이지요. 목련들은 겨울눈을 하고있지만 금세라도 망울을 터뜨릴 기세입니다. 뜰안에 자리한 나무들이 다 그런 모양새입니다. 모과나무, 석류나무, 보리수, 대추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라일락, 산딸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이 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동백은 한겨울에 피니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동백꽃은 크게 재래종과 개량종, 두 가지가 있는데 후자는 꽃이 크고 화려하지만 좀 천박해 보이는 면도 있으며 더욱이 질 때 아름답지 못한 게 흠입니다. 재래종은 꽃이 작지만 종(鍾)처럼 다부지게 생긴 데다 질 때가 멋집니다. 모가지가 싹둑 잘리면서 우수수 떨어져 땅 위에 모여 있는 붉은 꽃잎들의 자태가 아름답지요. 동백꽃 떨어지는 걸 보면 김용택의 시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생살에 떨어지는 꽃잎이 뜨겁다고 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매화꽃 떨어지는 모습을 노래했지만 어느 꽃이든 꽃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랑이 담겨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 사랑이 꽃이 되어 피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요즘 같은 날이 계속되면 땅바닥에서도 봄의 전령사들이 솟아날 것입니다. 복수초가 새의 혓바닥 같은 노란 꽃을 내보일 날이 기다려집니다. 복수초는 쌓인 눈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제격이지만 따뜻한 날씨만으로도 축복인데 쌓이는 눈까지 어찌 바라겠습니까. 복수초에 이어 머지않아 히야신스가 빨강, 흰색, 보라, 분홍 등 갖가지 색으로 찬 땅바닥 위로 얼굴을 내밀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계절의 변화에 맞춰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자연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큰 축복임을 알고 자연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동네 한옥집 대문과 기둥에 붙은 입춘첩처럼 길(吉)하고 넉넉한 시절이 올 것을 그려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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