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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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2017.02.01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언제까지라고 딱 정해진 인생이라면 얼마나 초조하고 무미(無味)할까요. 그런 한정된 인생이 아니니까, ‘인생 50’이라고 누구나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젊은 시절에도, 저는 은퇴 후의 여생에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일해 왔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저만의 잘못된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요.

여하튼 젊었을 때엔 일 중독자(workaholic)비슷 했습니다. 미국 통신사 기자로 일할 때, 가장 큰 걱정 하나가 경쟁사의 특종기사였습니다. 미국에 있는 본사와의 시차 관계로, 그리고 고객인 언론매체가 전 세계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자정을 지나 본사의 연락 전문(電文)이 날아오는 것은 다반사(茶飯事)였습니다.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있을 때였지만, 집에서 자다가 연락을 받고 회사 차로 심야(深夜) 거리를 질풍같이 운전해 사무실로 간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런 불규칙하고 근시안(近視眼)적인 기자 생활에서 은퇴한 뒤, 얼마 동안은 자유롭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매일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인생 50’이 ‘100세 시대’로 바뀌고, 출근시간이 없으니 자연 취침시간도 불규칙해지고, 시간은 언제나 있다는 식의 헛된 생각의 나날이었습니다. 

이처럼 비생산적 생활의 어느 날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딸의 권유로 무심코 같이 간 건강진단에서, 아내의위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들어닥친 3주간의 홀아비 생활은 불편보다 지금까지의 방종한 생활태도와 인생관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퇴원은 했지만, 아내는 3개월마다 검진을 받아야 했습니다. 1년 뒤부터는 6개월에 한 번씩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재발의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건강이 행복의 기본이란 간단한 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죽음의 그림자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닌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럴수록, 죽음의 공포감보다 인생의 허무(虛無)함이 오히려 저를 괴롭혔습니다. 50여 년 전 일제강점 말기, 전쟁터에 끌려가는 날만을 기다리던 어두운 시절의 좌절감이 생각났습니다. 

“어제도 그렇게 지냈었지/오늘도 또한 그렇게 지나가리라/ 이 생명/무엇을 허둥지둥 내일만을 걱정하나.”

이것은 일본 옛 봉건시대 어느 허무주의 시인이 읊은 전통 단가(短歌)입니다. 전시 실의(失意)에 빠진 우리가 몰래 사랑했던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억할 정도입니다. 

아내의 퇴원 후 회복돼 가는 그녀의 건강과 더불어, 저의 나날은 서서히 옛 스타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어 저 스스로 놀랐습니다.

젊었을 때 취미가 뭐냐고 물어오면 바로 대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 두는 곳이 많았습니다. 영화와 음악을 좋아했고, 장기와 바둑은 물론, 운동은 골프, 야구, 탁구, 테니스, 수영 등 하나 특출하게 잘하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즐겼습니다. TV를 통해 일본, 미국의 운동 경기 관전에 열중하고 좋아하는 선수도 많았습니다. 1990년대 말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숫자놀이 스도쿠(數獨 Sudoku)에도 10여 년 전부터 거의 중독자 비슷하게 빠졌습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무한(無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뒤늦게 깨달은 후, 저의 일상생활은 극도로 바뀌었습니다. 취침시간을 오후 10~11시로 정하고, 아침 6시~6시 반에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뉴스 외에 TV 시청은 되도록 피하고, 컴퓨터 사용시간을 대폭 줄였습니다. 

시력 감퇴로 영문, 국문 하나씩 구독하는 신문도 주로 제목만 읽고, 정기 구독하는 잡지는 한자를 많이 사용하여 읽기에 편리하고, 뒤늦게 시작한 글쓰기 자료로 필요한 일본 잡지 하나로 줄였습니다. 

이 시간 배정이 크게 변하게 된 것이 지난해의 미국 대통령선거전과 최순실 사건이 초래한 우리 국정 난맥(亂脈) 사태입니다. 결과만을 알면 된다고 몇 번이고 자신의 기자(記者)적 호기심을 억제하면서도, 중간 경과와 사건 뒷이야기에 시간을 낭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탄하고 후회합니다.

제 상식에서 너무나 빗나간 국내외 움직임에 한때 글 쓸 의욕까지도 잃고 다시 허탈감에 시달렸다가, 이제는 일상생활도 차츰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하던 옛 노래 구절이 생각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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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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