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活字)에 대한 경의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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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活字)에 대한 경의

2016.08.19

 
요즘 문화라는 말이 참 많이 쓰입니다. 정치문화, 군사문화뿐 아니라 식문화(食文化), 교통문화, 시위문화, 음주문화, 도박문화, 심지어 화장실 문화처럼 무슨 말이든 문화란 말을 뒤에 붙이면 그럴싸한 용어가 되니 어찌 보면 우리의 생활 자체가 문화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전문가에 의하면 문화는 그 정의가 11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저는 굳이 문화의 정의에 집착하기보다는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인간이 손을 사용하고 도구를 만들어냄으로써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지만 말과 글이 없었다면 문화가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과 글이 없이는 암흑과 몽매(蒙昧)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니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과 글이라 봅니다.

말이 먼저고 글이 나중이지만 말은 곧 글이 되는 것이니 이 둘은 한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글은 글자로 이루어지므로 문화에서 글자 혹은 문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자는 손으로 쓰기도 하지만 문서나 책을 만들 때는 목판이나 활자가 있어야 합니다. 서양에서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4~1468)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후로는 그때까지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던 성경이 인쇄본으로 나와 모든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가 구텐베르크보다 80여 년이나 앞서 1377년에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지심경(원제목: 佛祖直旨心體要節)을 찍어낸 활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 활자로 찍어낸 책이 남아 있다는 사실(직지심경 인쇄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일찍부터 높은 문화를 꽃피웠다는 걸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활자 발명에 있어 중국의 영향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음)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데다 우리 고유의 글자까지 만들어낸 민족이니 그 문화적 수준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상륙했던 프랑스 해군사관 장 앙리 쥐베르(Jean Henri Jubert 1644~1709)는 귀국 후 한 잡지에 기고한 ‘조선원정기’에서 당시 그가 목격한 조선 민가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극동의 모든 국가들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집 안에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 “조선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 완벽하게 자모를 갖추고 있는 이 기호체계의 언어는 극동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언어이다.”라고 기술합니다. 쥐베르는 우리 민가를 둘러보다가 집마다 책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그가 어떤 책들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에서 직지심경을 가지고 돌아간 것으로 보아 우리 활자로 찍어낸 한문과 한글로 된 책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양인들이 놀랄 만큼 당시 우리의 문자생활 수준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물론 그전에 이처럼 훌륭한 활자를 만들어낸 우리의 선조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인의 안목으로 강화도에서 경이적인 발견을 한 쥐베르는 귀국 후 유명한 화가가 되어 여러 살롱전에서 수차 수상도 한 것으로 알려짐) 

‘활자의 나라 조선’이란 국립박물관 전시(2016. 6. 21~9. 11)를 보고 새삼 가지게 된 생각들입니다. 박물관 전시 안내서에 따르면, 국립중앙박물관에는 82만여 자에 달하는 조선시대 활자가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는 국가 주도로 제작된 수백만 자 가운데 현존하는 활자로서 주로 17~20세기 초 중앙 관청과 왕실에서 사용한 것이며 한 왕조에서 만든 활자가 이처럼 많이 보전되고 있는 사례를 다른 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자와 함께 한글 활자도 만들었습니다. 또 활자는 국가에서만 만든 게 아니고 17세기 이후에는 민간에서도 금속활자를 만들어 주로 개인의 문집을 펴내는 데 썼다고 합니다. 금속활자와 함께 목활자(木活字)도 만들었으며 목활자는 그 자체로 인쇄에 쓰였지만 금속활자를 만드는 공정에서도 필요했습니다. 먼저 목활자를 만들어 흙 판에 찍어 그 파인 부분에 아연 합금을 녹여 부어서 멋진 금속활자들을 빚었으니 여러 체(體)의 활자를 만드는 기술 자체가 예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활자가 나오기 전에는 목판으로 찍어서 책을 만들어내었는데 목판은 하나의 책만 만들고는 더 쓰임이 없게 되지만 활자는 조합(組合)을 통해 온갖 다른 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 번 만들어서 여러 번 쓰인다는 점에서 그 능률성이 목판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주조(鑄造)되기 시작한 금속활자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마음대로 구해서 읽는 책이나 매일같이 보는 신문도 나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활자의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번에 최초로 기획한 활자 전시는 파손돼 있던 활자장(活字欌)을 최근 복원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고유한 활자 보관 방법을 알아냄으로써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이번 기획전이 있기 전에는 보유 중인 활자들을 자전(字典)처럼 획 수에 따라 단순 분류하여 수장고에 보관해왔다고 합니다. 최근에 와서 이 활자장들을 자세히 조사해보니 조선에서는 활자들을 이런 자전식 분류가 아니라 주로 활자의 생김새에 따라 분류하여 실용적으로 보관하고, 또 자주 쓰는 글자와 그렇지 않은 글자를 각각 정간판(井間板)과 서랍(舌盒)에 나누어 보관했다고 합니다. 이번 전시는 활자들을 제작 시기 별로 활자장의 각 칸에 보관돼오던 모습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게 되어 그 의의가 더욱 크다고 합니다. 이 분류법을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활자를 굳이 전시에 내놓을 필요도 느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전시를 자세히 보면서 우리 활자에 대한 경의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활자 사랑과 관련하여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직지심경의 터인 흥덕사가 있는 청주시는 올 9월 첫 주에 ‘직지코리아 국제페스티벌’을 개최한다고 합니다. 직지심경을 위요(圍繞)한 우리의 인쇄문화를 세계에 소개하고 세계의 다양한 인쇄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경상북도와 한국국학진흥원은 최근 삼국유사 목판(8만 9,200여 자)을 복원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우수한 기록문화유산을 확인하고 문화유산 전승의 가치를 확산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지난 5월에 양산 통도사의 성파 스님 주도 하에 민족통일을 기원하면서 고려대장경 자기(磁器) 16만여 판을 만드는 작업을 완성한 일도 문자에 대한 우리 민족의 믿음과 긍지를 잘 나타내줍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선조들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며 우리 문화유산, 특히 글자를 중심으로 하는 기록유산을 잘 보존하는 한편 우리가 쓰는 글과 글자를 더욱 아끼고 펼치는 노력을 지속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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