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일용노동자 울리는 신종 퇴직금 '포기' 계약 각서 논란
임금 안에 퇴직적립금 포함 계약
1년이상 일해도 퇴직금 지급하는 경우 없어
근로계약 체결 시 작성 각서, 사실상 퇴직금 포기각서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일당이 중요할 뿐 사실 퇴직금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ㄱ건설이 일용직근로자와 체결한 근로계약서. 임금구성항목을 보면 하루 임금 10만원안에 퇴직적립금 8,310원이 포함돼
있다. 이 계약서를 토대로 ㄱ건설은 근무기간중 이미 퇴직금을 다 지급했다고 주장하며 일용직노동자가 1년이상 일을 하고
그만둬도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가 ㄱ건설과 근로계약을 체결할때 작성한 각서.사실상 퇴직금 포기각서 논란이 제기
될 수 있는 부분이다. ㄱ건설은 일용직노동자가 스스로 ‘퇴직적립금을 매달 임금지급시 가불금으로
지급하길 원한다’는 각서에 서명을 한 만큼 퇴직시 추가로 퇴직금을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일용직노동자 입장에서 각서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고 퇴직금을 포기한다는 위법
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무효라는 입장이다.
퇴직금을 받으려면 1년 이상 한 회사와 근로계약을 맺고 일을 해야 하지만 건설현장의 특성상 일용직노동자는 붙박이로 1년 이상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소위 ‘십장’이라 불리는 팀장과 함께 여기 저기 현장을 전전하기 때문에 수시로 사용자가 변경될 수밖에 없다. 어쩌다 한 회사랑 계약을 맺고 1년 가까이 한곳에서 일을 해도 11개월쯤 되면 한 달을 쉬게 하거나 다른 공사현장으로 보내진다. 대형건설회사의 노무담당자간에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근속기간이 11개월쯤 되는 노동자들을 서로 맞바꾸는 방식으로 트레이드가 이뤄지기도 한다. 모두 1년 이상 근속시 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편법이지만 건설업계에서는 당연한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이로 인해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일당이 어떤 임금항목으로 구성돼 어떻게 계산되는지는 복잡하기도 하고 관심을 가질 이유도 별로 없다. 어차피 일당이 10만원으로 정해지면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역산해서 연장수당, 휴일수당, 연차수당 등이 10만원 안에 다 포함되도록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서울의 콘크리트타설 업종에서 도급순위 10위안에 들어가는 중견 건설업체 ㄱ건설이 수년전부터 한해 수백 명이 넘는 일용노동자들을 채용하면서 퇴직적립금을 일당 안에 포함시킨 근로계약을 체결해 논란을 빚고 있다.
ㄱ건설이 시공을 맡은 서울 강동구의 한 대형병원 건설현장에서 형틀 일을 하다 지난해 말 퇴직한 ㄴ씨도 변칙적인 근로계약 때문에 퇴직금 지급을 거절당한 경우다. ㄴ씨는 일용노동자로서는 드물게 ㄱ건설과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1년 넘게 일을 하다 퇴직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퇴직금을 지급받을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올해 초 노동청에 진정까지 제기했지만 아직까지 퇴직금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 ㄱ건설은 근로 기간 중 이미 퇴직금 전액을 지급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문제는 ㄴ씨가 입사할 때 무심코 서명한 근로계약서(사진)에 있었다.
ㄴ씨와 ㄱ건설이 체결한 근로계약서를 보면 기본급과 주휴, 휴일, 연장, 연차수당 포함해 하루 일당 9만1700원에 퇴직적립금이 8300원으로 하루 10만원이 지급되게 돼 있다. 일당은 10만원이 아니라 9만1700원이고 퇴직금이 매일 8300원씩 미리 지급돼 나중에 퇴직금을 별도로 청구할 수 없도록 근로계약서가 구성돼 있었던 것이다.
물론 퇴직 시 지급해야할 퇴직금이 근로 기간 중 지급됐다면 퇴직금 중간정산금지 조항 위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ㄱ건설은 이 역시 미리 빠져나갈 수단을 마련했다.
ㄱ건설의 노무담당 부장 ㄷ씨(60)는 “퇴직적립금은 중간정산금액이 아니라 퇴직 시 지급할 퇴직금을 미리 가불해서 준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근로계약서 퇴직적립금 항목에는 ‘가불금’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노동법을 잘 모르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무심코 서명한 계약서 사실상 퇴직금을 포기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의 이석진 노무사는 “계약서에 지급금액이 10만원으로 적혀있으면 일당이 10만원이라고 생각하지 누가 일당은 9만1700원이고 퇴직금을 매일 몇 천원씩 가불받는다고 생각하겠느냐”고 반문했다. ㄱ건설이 퇴직금 지급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칙적인 근로계약으로 일용직노동자들의 퇴직금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ㄱ건설측은 이 노무사의 주장에 “입사할 때 ‘매월 임금 지급시 퇴직적립금 상당액을 가불해 주기 바란다’는 각서(사진)에 서명을 하기 때문에 근로 기간 중 퇴직적립금을 미리 가불받는다는 걸 모르는 노동자는 없다”고 반박했다.
ㄱ건설측은 “입사할 때는 물론 퇴직할 때도 퇴직금을 전액수령 받았다는 확인서를 받는다”며“입사와 퇴사시 각서에 서명까지 해놓고 나중에 퇴직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하지만 ㄱ건설의 주장은 건설회사가 내민 계약서와 각서 서명을 거부하면 당장의 일자리는 물론 나중에 다른 현장에서 일하기도 어려워 질 수밖에 없는 일용직노동자의 처지는 전혀 감안되지 않는 것이다.
이 노무사는 “일용직노동자들의 고용상 불안정한 지위를 이용해 회사가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고도 퇴직금을 다 받았다는 합의서를 사실상 강요해서 받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각서에는‘차후에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면 어떠한 조치도 감수하겠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어 노동자들이 퇴직금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더욱 엄두를 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노무사는 “퇴직적립금을 일당에 포함시키는 방법으로 퇴직금을 떼먹는 신종계약이 성행할 경우 전국의 수많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며 “ㄱ건설의 변칙계약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건을 접수한 서울동부고용노동청도 이 점을 감안해 ㄱ건설에 진정을 제기한 2명의 노동자에 퇴직금 지급을 권고했으나 ㄱ건설은 ‘소송까지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ㄱ건설 노무담당부장 ㄷ씨는 “어차피 1인당 퇴직금이라고 해봐야 1백~2백만원 정도라 변호사 수임료까지 생각하면 합의를 보고 끝내는 게 좋지만 다른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선례가 될 수 있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타 회사는 퇴직금 부담 때문에 1년이 되기 전에 다른 현장으로 노동자들을 보내서 불안정하게 일을 시키지만 우리처럼 계약을 하면 1년 넘게 계속 일을 할 수 있어 노동자들에게도 더 유리할 수 있다“는 변명도 늘어놨다.
ㄱ건설의 한 관계자는 “우리도 일용직들에게 퇴직금 제대로 주고 싶지만 인건비에 퇴직금까지 넣어서 입찰하면 가격경쟁에서 밀려 다른 업체에서 일감을 가로 채가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ㄱ건설 스스로도 일당에 퇴직적립금을 넣는 식으로 계약을 맺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퇴직금 지급을 회피하기 위한 고육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강진구 기자 kangjk@kyunghyang.com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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