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러우려면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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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러우려면

2015.11.02


9월이 한 달 더 붙은 것처럼 볕 따갑고 하늘 높던 9월 닮은 10월의 끝자락에서 기온이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11월 날씨가 10월 날씨 같겠지? 그럼 가을이 한 달 더 늘어나는 거 아냐? 오메 좋은 거~~.’ 하며 머리를 ‘굴리던’ 제 앞에 “흥, 누구 맘대로?”하면서 11월 추위가 제자리를 찾아 성큼 들어섰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계절에도 공짜는 없나 봅니다. 

생각하기 따라선 공짜는커녕, 9월 같은 10월을 보내고 바로 11월의 추위가 닥쳤으니 10월을 도둑맞은 느낌도 듭니다. 계절을 당겨 맞이하기도, 연장해서 느끼는 것도 가능치 않으니 그저 변화의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만이 계절 앞에 취할 수 있는 태도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저는 요즘 노자의 <도덕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연초에는 장자를 공부했으니 올 한 해는 장자와 노자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두 어른이 하시는 말씀의 골자는 자연의 변화를 삶 속에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자연이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그게 제일 잘 사는 법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연은 무슨 일을 할 때 ‘무위’로 합니다.  자연과 삼라만상의 변화는 ‘함이 없는 함’의 결과입니다. 무엇을 한다는 요란이나, 생색이나, 거드름이나, 잘난 척이 전혀 없었음에도 어느 순간 보면 제 할 일을 다 해 놓은 것, 하지 않는 듯 은근히, 슬며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함이 없는 함’이자 ‘무위의 위’입니다. 

천지 나무에 때깔 고운 채색 옷을 입히는가 싶으면 한순간에 죄다 벌거벗기고, 연이어 벗은 가지를 희디흰 눈옷으로 가리는가 싶으면, 산하를 덮은 두꺼운 흰 무명 이불을 일시에 걷어내고 아른아른한 꽃 이불을 내어 줍니다. 동서고금 어떤 강자도, 어떤 문명도 사계의 변화를 그대로 재현해낼 수 없기에 ‘유위의 함’과 ‘무위의 함’은 차원이 다른 세계의 일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도’가 그런 것입니다. 그는 천지에 두루 끼치지 않는 곳이 없고,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음에도 도무지 그 존재감을 감지할 수 없다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고 말합니다. ‘있는 것 같지가 않다’는 말은 인간의 오감에 잡히지 않고, 순수 이성의 인식 대상도 아니기 때문에 언어나 개념의 그릇에 담기지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냄새도 맛도 색도, 촉감도 없고, 들리거나 보이지도 않고, 사유나 분석의 대상도 아니니 이 세상에서는 한마디로 ‘없는 것’이지요. 그 없는 것으로 인해 있음이 되는 것, 무에서 유가 실현되는 것, 그것은 바로 자연의 생성 변화의 양태이자 생명의 모습입니다.     

노자는 이 도가 특별히 사람살이, 인간관계에 적용될 때를 ‘덕’이라고 일렀습니다. 마치 기독교에서 태초로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다 하듯이 태초에 도가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으로 들어온 것이 예수라고 하듯이, 도가 현현한 것이 덕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견주어 생각해 봅니다. 

주의 뜻대로 사는 것, 그것이 기독교적 무위라고 할 수 있다면, 인간사를 무위로 운영하는 것, 흔히 말하듯 순리대로 사는 것, 이것이 곧 ‘덕스럽게’ 사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노자와 장자의 ‘도’와 ‘무위자연’ 사상을 공부하다 보면 공자, 맹자가 말하는 ‘인의예지’보다 ‘윗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저 무위할 것을 말하는 두 선생께서 아무리 당대의 라이벌이라 해도 공맹의 사상을 자기들 것과 비교하면서 ‘줄 세우기’를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매사 우열을 가리고 판단과 분별심에 ‘쩔어 있는’ 저의 유위의 습관에 기인한 것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노자는 덕을 삶 속에서 제대로 실천하면 인의예지는 저절로 따라온다고는 했습니다. 여하간에 인의예지는 ‘유위’를 토대로 하는 것이고, 유위보다 무위가 윗길이라는 것은 명백한 것이니까요. 

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자연스럽다’는 말은 이처럼 실로 거대하고 참으로 위대한 말입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생성 변화에 대한 경이로움에 머리를 조아리고 옷깃을 여밀 수 있는 삼가는 마음이 있다면 말입니다. 

11월을 맞아 계절의 변화를 글로 써보고 싶어 노자, 장자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지금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칩니다. 자연스러움을 급속도로 잃어가는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하고 들을 때가 ‘자연스럽게 보이는 성형 수술’ 운운할 때라는 것 말입니다. ‘자연’의 본뜻을 깨닫는다면 유위와 인위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성형 수술을 놓고 ‘자연스러움’ 운운하는 자체가 얼마나 모순이자 아이러니인지 당사자들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게스트칼럼 / 이정원

'코드 55'


신호나 몸짓을 통해 쌍방 간의 의사를 교환하거나 비밀리에 작전을 주고받는 예는 요즘 운동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야구에서 감독이나 코치가 자기 선수들에게 현란한 몸짓으로 작전을 지시하는 예는 하나의 볼거리로 진화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투수와 포수가 사타구니 아래로 주고받는 몸짓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경우도 스포츠의 재미를 더하는 명장면입니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 병원과 관련된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눈길을 끌었습니다. 미국의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에 한 전문 의학기자가 기고한 ‘간호사의 세계를 통해 알아낸 미국 의료계의 비밀’이라는 글이 소개되었는데 알렉산드라 로빈스라는 이 기자는 이 기고문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 환자들이 잘 모르는 병원의 비밀을 간호사의 말을 통해 공개하였습니다.

내 흥미를 끈 것은 의사가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은어가 있다는 신비함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에 소개해 보면 “환자가 모르는 암호가 있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거나 불치병에 걸린 상당수 환자들은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가족들은 가급적 살려달라고 통사정한다. 환자와 가족 사이에 끼인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되 기준에 미달하는 정도만 하는 절충을 택하기도 한다. 통상 심폐소생술 코드 중 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심폐소생술은 ‘코드 55’라고 하며, 소극적 심폐소생술은 ‘슬로 코드’ 또는 ‘코드 54’라고 한다.”는 대목입니다.

나는 이러한 암호가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들끼리 비밀리에 주고받아야 할 선의의 필요악이라고 봅니다. 환자나 환자 가족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직설적인 설명을 하기보다 자기들끼리 은어를 통해 처치방법을 정하고 가족이나 환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암호를 주고받으며 치료를 한다면 당사자들이 느끼는 공포는 훨씬 가벼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생사와 직결되는 가장 민감한 순간에 의사들이 이렇게 우회적인 암호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측면에서 보면 가족이나 환자에게 훨씬 큰 도움과 위안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은어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한껏 느껴 봅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와 같은 생사의 기로에 직면했을 때 만약 ‘코드 55’라는 은어를 알고 있는데 의사가 ‘코드 55’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말은 어떻게 순화해서 전달하느냐에 따라 감정의 이합집산이 다릅니다. “이봐! 당신 말 다했어?”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이 기분이 나쁘지만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라고 말하면 듣는 상대방이 기분이 좀 누그러집니다. 그게 언어의 묘미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이렇게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전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의사가 “당신 아내는 곧 죽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아무래도 사모님께서 다시 일어나시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라고 우회적인 표현을 쓴다면 듣는 사람의 마음이 좀 편한 게 사실입니다. 그게 바로 ‘간접 화법’이요 ‘착한 화법’입니다. 총으로 공포만 쏴도 죽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만약에 오늘내일하는 환자보고 “이제 죽을 준비를 하십시오,” 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 “목숨은 신만이 압니다. 최선을 다하겠으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라고 말한다면 비록 자기 죽음을 예측한다 해도 일말의 기대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는 극작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단편소설을 기억합니다. 소녀의 죽음을 예견한 한 화가가 소녀가 앓아누워 있는 침실 문밖의 나무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 한 잎의 나무 잎새를 페인트로 그려 놓아, 소녀는 매일같이 지지 않고 매달려 있는 그 마지막 잎새를 보며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간다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이렇듯 어떤 특정 요인은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죽고 싶지 않은 갈망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일본 도호(東邦)대학 의료센터 연구팀은 “죽음은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가장 큰 스트레스임을 의미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이것은 남아 있는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다 보면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말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생사기로의 환자에게는 ‘코드 55’가 망망대해를 밝히는 등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이 한마디야말로 모든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구세주와 같은 것입니다. 의사들만이 주고받는 암호인 이 은어가 생명의 꽃을 피우는 희망의 메시지로 자리매김하는 날 또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이 연장될 것입니다. 나는 ‘코드 54’나 ‘코드 55’ 같은 은어가 사람을 기분 나쁘지 않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필요한 암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숨어 있는 1인치를 찾아내는 적극적인 부활의 삶’이며 생명을 연장하는 ‘기적의 삶’인 ‘코드 55’는 인생의 벼랑에 선 사람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하여 황혼 길에 접어든 우리라 할지라도 희망을 갖고 새로운 욕망을 꿈꾸게 하는, 생명을 지키는 지렛대로 가슴에 품어야 할 귀중한 상징인 것입니다. 지금 ‘코드 55’는 내 남은 날들의 사랑 앞에, 문학 앞에, 가족 앞에, 푸른 불빛으로 켜져 있는 신호등이라 믿습니다. 

필자소개

이정원

시조시인. 1939년 충남예산 출생.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공무원으로 정년퇴임. 2005년 계간 ‘현대시조’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한국시조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강남지부 한국영상문인협회 회원. 온라인카페 '현대시조' 운영자. 현대시조 ‘좋은작품상’ 등 수상. 시조집으로 ‘얼레와 어금니’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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