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나 자신만의 죽음을 주소서" [임철순]

"아름다운 죽음"


www.freecolumn.co.kr

"주여, 나 자신만의 죽음을 주소서"

2015.10.09


우리나라가 '죽음의 질' 평가에서 세계 18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산하기관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가 전 세계 80개 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 5일 발표한 '세계 죽음의 질 지수' 보고서에 의하면 ‘죽음의 질'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영국입니다. 100점 만점 기준 93.9점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벨기에 대만 독일 네덜란드 미국 프랑스 순입니다.  

10위 다음은 캐나다 싱가포르 노르웨이 일본 스위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한국입니다. 한국에 이어 덴마크 핀란드 이탈리아 홍콩 스페인 포르투갈 이스라엘 폴란드 칠레 리투아니아 체코 우루과이 푸에르토리코 러시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사우디아라비아 순이니 대한민국이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위 복지 선진국이라고 알고 있는 덴마크 핀란드보다도 순위가 높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한국은 아시아에서 대만 싱가포르 일본에 이어 네 번째입니다. 더욱이 5년 전 처음 조사했을 때 40개국 중 30위였으니 그동안 열두 계단이나 뛰어오른 셈입니다. '치료의 수준' 항목 대부분에서 5점 만점을 받는 등 의료시설 및 의료진의 질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죽음의 질’이 낮은 나라를 거꾸로 1위부터 10위까지 꼽아보면 이라크 방글라데시 필리핀 나이지리아 미얀마 과테말라 에티오피아 우크라이나 인도 말라위 순입니다. 이어 스리랑카 케냐 잠비아 짐바브웨 베트남 이집트 탄자니아 인도네시아 모로코 가나 우간다 몽골이 꼽혔습니다.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 한국인들은 정말 감회가 새롭고, 할 말이 많습니다. 우리가 대체 언제부터 죽음의 질을 따졌습니까? 안 죽고 살 수만 있으면 다행이었지요. 다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죽음의 질’이란 결국 ‘삶의 질’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질’은 바꿔 말하면 어디에서 죽는 게 편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1위로 평가된 영국은 오래전부터 의료복지 시스템을 개발·개선해왔습니다.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국민 건강을 국가가 책임지는 공공의료의 대명사로,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높은 제도입니다. 의료도 하나의 상품이며 소비자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식 의료제도와는 정반대인 게 영국의 의료제도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그 매체 EIU는 죽음을 앞두고 찾아갈 수 있는 병원 수, 치료의 수준, 임종환자에 대한 국가의 지원, 의료진 수 등 20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평가한 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매기고 있습니다. EIU가 이런 조사를 실시하고 그 평가 결과 영국이 가장 ‘죽음의 질’이 높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나라와 자기 매체에 대한 자랑이거나 장삿속일 수도 있습니다. 

20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살펴볼 때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 소위 10위 안에 든 것으로 평가된 나라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의료한류’라는 말이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의료수준, IT기술과 접목된 의료·복지 정보의 신속한 생산과 원활한 유통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에게 더 빠르게 더 정확한 의료·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가 늘 주력해야 할 업무입니다. 

하지만 의료기술이나 잘 죽을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이런 시스템의 운영 또는 운용을 인간화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정이나 배려가 없는 시스템, 인간의 마음이 빠진 채 소프트웨어의 뒷받침 없이 하드웨어만으로 운영되는 의료·복지는 죽음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죽음의 질은 삶의 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과 이름 없는 시민의 죽음이 같을 수 없습니다. 같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죽을까, 한 번뿐인 이 소중한 죽음을 통해 나는 무슨 말을 남기고 갈까, 사회적 비중과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이런 생각을 미리 정리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의료·복지 시스템과 관계없습니다. EIU라는 매체의 평가와도 거리가 있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런 평가를 계기로 우리 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근본적으로, 잘 죽는다는 것은 어디에서 죽느냐, 어떤 치료를 얼마만큼 만족스럽게 받고 죽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잘 완성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만의 죽음을 온전하고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어야 잘 죽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이라야 잊히지 않습니다. 

가을이면 릴케의 시가 곧잘 생각납니다. 그중에서도 이 경우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시구입니다.  "오 주여, 모든 이에게 그 자신만의 죽음을 주소서."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