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國歌) 같은, 국가 아닌, 애국가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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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國歌) 같은, 국가 아닌, 애국가

2015.09.14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애국가가 작곡된 지 80년,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선생의 서거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그런 뜻깊은 해를 기념하여 지난 8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2015 한국환상곡’ 이란 제목의 애국가 기념음악회가 열렸습니다.

안익태 기념재단과 일요신문이 공동 주최한 이 음악회는 애국가로 시작되었습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일제히 일어나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연주에 맞춰 국립합창단, 재단이 모집한 국민참여합창단, 숭실콘서트콰이어와 함께 애국가를 4절까지 열창했습니다. 

애국가는 이날 콘서트의 피날레를 장식한 안익태의 대표작인 교향곡 ‘한국환상곡’의 종반부에서 다시 한 번 장엄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 교향곡에는 한국의 모든 소리가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 절간의 풍경소리, 흥겨운 농악소리, 해방의 감격, 전쟁의 고통과 신음, 건국의 고동소리 등이 모두 수렴된 듯했습니다.

음악회 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선 애국가 선율이 맴돌았으나 머릿속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애국가가 광복 70주년이 되도록 공식 국가(國歌)로 제정되지 못한 사실, 그것이 작사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점 외에, 작사자와 작곡자의 친일 논쟁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작사자가 누구냐에 관해서는 윤치호(1865~1945), 안창호(1878~1938), 민영환, 최병선 등 여러 사람 중에서 앞의 두 사람이 그중 많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윤치호 작사설은 작사자로 이름이 적혀 있는 악보가 존재하는 등 증거의 확실성에서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노년의 친일 행각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가사에 담긴 애국적 의미조차 의심을 받는 지경입니다. 그는 일제 말에 일본 귀족원의 의원까지 지내 2009년에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명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그에 비해 안창호 작사설은 추론적인 요소가 있어보이지만 그가 초지일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라는 사실로 인해 그의 애국가 작사는 당위로 평가받고 있는 듯합니다. 

작곡자가 안익태(1906~1965)인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도 친일의 딱지가 따라붙습니다. 1942년 그가 일제의 괴뢰국가인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기념식 때 ‘만주환상곡’을 작곡해 지휘한 이유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고, 최근엔 1936년 무렵 루마니아에서 열린 일본 명치절 행사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연주했다는 안익태의 일본인 후원자가 썼다는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안익태와 관련한 두 사건은 모두 1930년대 후반 일본인 후원자와의 교유가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음악적 재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볼 여지도 있어 친일로 매도할 일만은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애국가를 작곡한 1935년까지 안익태는 망국의 설움을 안고 세계를 떠돌던 음악가였으며, 국가를 작곡하겠다는 일념에서 세계 각국의 국가를 연구하던 중 신의 계시처럼 떠오른 악상을 옮긴 것이 애국가였다고 생전에 회고했습니다. 

최소한 애국가 작곡 이전, 그의 행적에서 친일이나, 음악세계에 왜색의 혐의는 없습니다. 그런 점이 감안돼 2009년 반민족행위자 명단에서 안익태의 이름은 빠졌습니다. 애국가를 국가로 지정한다고 할 때 작곡자와 관련된 결격시비는 덜어진 셈입니다. 

남은 것은 윤치호의 친일 부분입니다. 그가 애국가를 작사한 시기는 1907년으로 한일합병 전입니다. 그 시절 그는 독립협회 회장으로, 대한자강회 회장으로 나라의 독립을 꿈꾸던 개화파 지식인이었습니다. 

나라가 일본에 병탄된 뒤인 1911년에도 초대 총독 데라우치 암살이라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투옥됐습니다. 4년 뒤 일제에 전향을 서약하고 석방된 뒤부터 그는 극단적 친일 행각을 벌였습니다.

친일의 문제는 해당 인사의 전생애적인 평가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가 친일 이전에 독립투사였더라도 그것은 친일을 위한 위장행동으로 간주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적어도 애국가 가사에 윤치호의 애국충정이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가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혔다고 해서 그런 순수성조차 부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윤치호가 친일했기 때문에 국가(애국가) 작사자의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면 애국가는 영원히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친일은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애국가를 폐하고 국가를 새로 지으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것은 해결책도 아니고, 애국가를 그 누구의 작사 작곡이 아니라 나의 노래라고 생각하는 절대다수 국민들이 원치 않는 일입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애국가와 함께한 세월입니다. 영광의 순간, 고난의 순간에 우리는 애국가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윤치호 안창호 안익태의 애국가를 뛰어 넘어 5천만의 애국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1982년 국가제정추진위가 발족돼 애국가의 가사가 감상적, 의타적(하느님이 보우하사), 소모적(마르고 닳도록), 반도사관적(무궁화 삼천리)이라는  등의 지극히 주관적인 이유로 국가를 새로 제정하려 했으나 무산된 것도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948년 인민군 창설 때까지 애국가를 불렀던 북한이 새로 국가를 만들었지만 그들은 새로 만든 국가 대신 ‘김일성장군의 노래’라는 우상화 노래를 국가로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남북통일이 된다면 북녘 땅에서도 다시 애국가가 울려 퍼져야 한다고 봅니다.

애국가의 작사자가 많은 것이 국가 지정에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1955년 국사편찬위가 결론을 냈듯이 작사자를 '미상’으로 남겨놓고 작곡자만 특정해 국가로 지정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세계에는 일본이나 영국처럼 작사자가 미상인 국가도 많습니다. 

애국가도 안익태가 작곡하기 전에는 찬송가나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자인’ 같은 곡에 실려, 다양한 버전의 가사로 불렸습니다. 작사자 미상은 사실관계에서도 타당성을 지닐 수가 있습니다. 

조국도 없이 남의 땅에서 서럽게 태어난 애국가입니다. 애국가를 둘러싼 친일 문제도 어찌보면 식민지 시대의 상처입니다. 조국을 잃었을 때 망국의 한을 달래주었고, 광복 후엔 조국의 영광과 시련을 함께해온 애국가입니다. 이제는 ‘국가가 아닌 국가 같은 애국가’를 공식 국가로 지정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것이 애국가를 자주적으로 친일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길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필자는 1970년 중앙대 신문학과를 나왔으며 한국일보사와 자매지 서울경제의 여러 부서에서 기자와 데스크를 거쳤고, 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을 지냈습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 위원 및 감사를 지냈고, 일요신문 일요칼럼의 필자입니다. 필명인 드라이 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게스트칼럼 / 박대문

70년의 기다림, 사할린 동포

기다림은 그리움입니다. 가슴에 젖어드는 설렘과 아련함에 가슴 졸이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냥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여야 한다면 기다림은 그리움이 아니라 가슴에 앙금으로 가라앉아 쌓여만 가는 한이 되고 잔인한 고문과 같은 형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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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나라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분단 70년을 되돌아보며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하고 선진 한국, 통일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을 자축하고 전 세계에 알리는 국민화합 대축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70년의 긴 세월을 내 나라, 조국 대한민국을 애타게 찾으며 못 잊어 하면서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 동포가 있으니 바로 사할린 한인 동포들입니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기다림에 지쳐 이제는 원망스럽고 한 맺힌 야속한 조국으로 인식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하게도 사할린 우리 동포들의 삶에 얽힌  애환과 질곡의 일부를 알게 되고 큰 충격을 받으면서부터입니다.

지난달 동호인 일행이 우리 식물도감에 기재되어 있는 우리 풀꽃이지만 북한에서 자라기에 만나볼 수 없는 북방계 식물을 찾아 사할린 식물 탐방길에 나섰습니다. 이것 또한 분단 70년의 결과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역사와 문화탐방이 아닌 식물탐사를 목적으로 왔기에 별생각 없이 사할린에 들어왔고 저녁 식사 겸 구경 삼아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 들렀다가 가족과 고향과 조국을 잃은 사할린 징용광부들의 처절한 삶과 소망, 후손들의 생활상을 일부 듣게 되었습니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 앞마당에는 한국과 사할린 민간단체의 힘으로 세워진 세 개의 비석이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할린 희생사망동포 위령탑’이고, 나머지는 ‘사할린 이중징용광부를 위한 비’와 ‘사할린 한인 이중징용광부 피해자 추모비’였습니다. ‘이중징용광부’? 들어 보지 못한 낯선 단어였습니다. '이중징용광부'란 전쟁의 막바지에 미군의 공습이 강화되어 사할린에서 생산한 석탄을 본토로 운송하는 화물선 운항이 어렵게 되자 일제가 급기야 1944년 8월 25일부터 사할린의 탄광 문을 닫고 여기서 일하던 조선인 노무자 3천여 명을 영문도 모른 채 배를 타게 한 후에 삼엄한 감시 속에 일본 본토에 있는 탄광으로 끌고 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리게 했던 광부를 말합니다. 이들은 한 번은 사할린으로, 또 한 번은 일본 본토로 두 번이나 강제 징용을 당한 것입니다. 금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시마섬’, ‘군함도'라고도 하고 '지옥섬'으로도 불리는 이 섬도 이중징용광부가 강제노역했던 탄광 중의 하나인데 이 섬의 노역 상황이 가장 처참했다고 합니다.

한인 문화센터 앞마당에 세워진 이중징용광부를 위한 비(碑)들에 실린 비문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한국에서 사할린으로 강제 연행되면서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사할린에서 본토로 강제 연행되면서 처, 자식과 영문도 모른 채 또 생이별한 이중징용광부들, 사할린의 처자식과 헤어져 일본 본토로 끌려간 이들은 작업 현장에서 이름 없이 죽어 나가고 원폭 투하로 전쟁이 끝나면서 뿔뿔이 헤어지고 소식이 끊겨 아직도 정확한 피해 인원과 행방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다 합니다.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는 일본 식민지 정책에 의한 것인데 1925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940년대에 급증했다고 합니다. 제국주의 일본은 일본인, 한인들을 사할린에 이주시켜 땅을 개척시키고, 탄광업과 목재업, 어업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한반도에서 많은 청년을 모집, 관(官) 알선, 징용의 형태로 이주시켰으며 특히 전쟁 말기에는 징용이란 강제 수단을 써서 동원하였습니다. 모집, 알선으로 간 사람일지라도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이주라서 자유의사가 통하지 않은 강제적 이주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현재 주민의 대부분은 러시아인(78%)이며, 한국인은 소수민족 중 최대(6.5%)로 약 4만 3,000명이 살고 있으며, 한인 1세와 그 후손 가운데 귀환을 바라는 사람은 7,000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한인문화센터 앞마당 비와 달리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에는 ‘망향의 언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수륙만리 이국에서 전쟁이 끝나자 고향 잃고 고국 잃은 채 전쟁 기간에 겪은 강제 노역과 멸시, 천대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다 생을 마감한 한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배 모양의 위령탑입니다. 이 위령탑 바닥에는 아래 비문이 씌어 있습니다.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 이분들은 굶주림을 견디며 / 고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혹은 굶어 죽고 혹은 얼어 죽고 / 혹은 미쳐 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 배는 오지 않아 하릴없이 빈손 들고 / 민들레 꽃씨마냥 흩날려 /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남으로써 대한민국은 해방되었고 멀리 사할린에 끌려간 동포들은 바라고 바라던 귀향의 때가 왔다고 믿었으며. 패전국으로서 전범의 국민인 일본인들보다 앞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46년 ‘미소 귀환협정’으로 일본인 30만 명의 귀국이 개시되었고 다음 해 1947년 여름에 중국인(대만인)도 조국이 보낸 귀환선을 타고 모두 돌아갔으나 먼저 귀국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사할린 한인 귀국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습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서 귀국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소련과 국교가 없고 반공 이념에 몰입된 대한민국은 이들을 찾을 여건과 경황이 없었고 강제로 끌어간 일본은 나 몰라라 팽개쳤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사할린을 양도받아 노동력이 필요한 소련은 한인의 억류가 필요한 상황이라서 이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버림받은 국적 미아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할린 한인들은 오직 일시적인 체류일 뿐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리라 굳게 믿고 기다린 지 70년! 하지만 아직도 뜻을 이루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고 일부 귀국한 동포라 하더라도 1945.8.15. 이후 출생한 자녀들은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살 날 몇 년 남지 않은 70 넘은 노인들만이 귀국하였으니 살아갈 방도도 막막하고 두고 온 사할린의 자식들과도 또 생이별한 이산가족이 되어 또다시 이별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이별 속 삶으로 한 생을 마쳐야만 하는 이 세상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한 맺힌 삶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의 한 맺힌 삶의 응어리를 누가 무엇으로 풀어 줄 것이며 사할린 한인 동포들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어찌 달래며 모국의 사랑과 관심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 것인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70년의 길고 긴 기다림과 메아리 없는 모국의 외면으로 현지 사할린 한인 동포의 아픔과 기대는 세월 속에 묻혀가고 일본은 이들의 기록과 사실을 공개하지 않아 이제는 징용으로 끌려간 후손 한인 동포와 대륙에서 건너온 고려인, 일본에서 건너온 한인들이 뒤섞여 필요에 따라 징용으로 끌려온 사할린 한인 동포 신분으로 자처하는 등 가닥을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당당하고 힘센 국가가 되어 국위를 선양하고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는 선진 한국이 되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일뿐이라고 봅니다.

이중징용광부들이 가장 처참하게 죽어간 역사적 사실이 있는 섬, 하시마섬을 금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유네스코의 하는 꼴을 보면 과연 UN 산하 국제사회기구도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의로운 조직이요 믿을 수 있는 국제기구라 할 수 있겠는가? 우선 일본이라는 국력으로 정의를 밀어붙이고 역사적 사실을 말살하는 작금의 작태를 보면서 양국 간 우열의 차이를 보는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약자로서의 피해자 입장에서 지난날의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며 ‘과거를 사죄하라!’,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등 억지 춘향 격 사과 요구와 과거의 수난사를 들춰내는데 집착하기보다는 국력을 한데 모아 막강 국가가 되어 대륙의 문화 전래와 독립운동의 당당한 역사를 바탕으로 저들의 비행과 만행을 질책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지난 역사와 정권의 업적과 잘한 점은 무시, 폄하하고 흉과 허물만 침소봉대하여 파헤치고 들춰내는 쌈박질로 국력만 낭비하는 정치권, 사회권 모두가 심기일전하여야 합니다. 똘똘 뭉쳐 강하고 위상 높고 부유한 국가를 이룩하여 해외에서 원귀 되어 떠도는 불쌍한 우리 동포의 한을 풀고 그들 후손의 설움과 한을 달래줄 날이 언제나 올까? 그곳에서 비명횡사한 동포의 한을 누가 달래 줄 것이며 생사의 흔적조차 모르는 그 후손의 마음을 누가 어루만져 줄 것인가? 
‘아! 사할린’을 절규하며 이들의 한을 달래 봅니다.




아! 사할린 

그 누가 알랴?
가족 떠난 외로움을 
고향 잃은 서글픔을 
국적 잃은 참담함을.
수륙만리 이국 하늘 사할린 해변에서
고국 하늘 바라보며 바람처럼 스러져 간 
임들의 슬픈 행로를 그 누가 알랴! 

망망대해 수평선 너머 
가물거리며 나타날 듯한 까만 배 한 척 
행여 고국 가자! 
날 찾는 귀국선인가?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사그라진 외로운 넋들이여!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애타 죽은 가엾은 넋들이여!

한 맺힌 그리움은 세월 갈수록 짙어만 가고
보고픈 부모 형제는 밤낮으로 눈앞에 어른대는데
70년을 기다려 온 한 맺힌 응어리
백 년 안에 스러지는 짧은 생이지만
천 년 가고 만 년 간들 그 응어리 풀리리오.

한 서리고, 쌓이고, 맺혀만 가는 
아! 사할린.
칠흑의 차가운 밤하늘을 
갈 곳 잃어 떠도는 영령(英靈)이여!
창공에 빛나는 별빛 되소서.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 되소서.

그리하여
별빛으로 오소서. 
구름으로 오소서.
꿈에도 잊지 못했던 
임의 고향 하늘에 
아! 사할린의 임들이여!

(2015. 8월 사할린 에서)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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