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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공화국’, 부끄러운 자화상
2015.09.11
복지 국가의 표상이라 할 만한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에서 얼마 전 대중교통 수단만을 이용하며 여러 미술관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서 그리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입장하면서 ‘꼬박꼬박’ 현금으로 요금을 지불했습니다. 노인 우대(senior discount) 혜택이 없기도 하거니와 결코 싸지도 않아 비용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나도 모르게 문득 ‘서울에서는 모두 무임승차, 무료입장인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마운 조국’이라는 생각과 함께 괜히 억울하다는 느낌마저 잠시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순간적이긴 하지만 ‘공짜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다는 생각에 부끄럽다 못해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마치 내 깊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았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인 1960년대, 어쩌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임금을 받았는데 세금으로 얼마를 제한다는 명세서가 있었습니다. 시쳇말로 원천징수를 당한 것입니다. 그때 아마 “벼룩의 간을…” 하며 중얼거렸던 것 같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며 첫 월급을 받을 때도 그랬습니다. 월급이 학생 시절 받던 장학금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에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명세서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세금으로 ‘빼앗기는’ 액수가 생각보다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근 30퍼센트에 달하는 세금에다 의료보험료, 복지연금 등으로 떼어가는 액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필자는 서서히 소득이 발생하면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게 누구나 예외 없이 지켜야 할 ‘의무’라는 것을 터득했던 것 같습니다.독일에 있을 때 필자는 전공이 피부과학이고 성병(性病) 질환이 피부과학 영역에 속해 있다 보니 필연적으로 성매매 여성을 진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에는 공창(公娼) 제도가 있어 여기에 등록된 여성(Die oeffentliche Prostituierte)들은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필자는 폐쇄된 공간인 특별 병실에서 그들을 진료하다가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 여성은 남편이 우편배달원인데 그녀가 저녁에 ‘출근’할 때면 차로 데려다주고 ‘퇴근 시간’이 되면 픽업을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는 태도에 필자는 당황한 내색을 감춰야 했습니다. 그녀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네 부부가 3년만 더 열심히 일하면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곤 뜬금없이 “나도 국가에 세금을 낸다”며 당당해하는 것이었습니다[독일 조세법에 따르면 성매매 여성은 소득세 외에 영업세(Gewerbesteur)도 낸다]. 순간 ‘맞아, 나도 그 알량한 아르바이트 임금을 받을 때 세금을 냈었지’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론 매체에 의하면, 근래 우리 사회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사업자가 40퍼센트가 넘는다고 합니다. 놀라운 수치입니다.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발생하는 소득에 아주 낮더라도, ‘시늉만큼’이라도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국내 종교계 종사자들(가톨릭계 제외)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는 조세 전문가가 아니지만 왠지 사회 정의에 어긋나고 비평등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위의 독일 성매매 여성이 “나도 국가에 세금을 낸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모습이 인상 깊게 남는 것은 아마도 낼 세금을 내는 자의 떳떳함과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는 탈세자의 비굴함이 확연히 대비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필자도 언제부턴가 공짜로 지하철을 타면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경로 우대를 받아야 기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지 국가를 표방하는 외국에 나가서 공짜 타령이나 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공짜 풍조에 물들었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우리 사회가 ‘공짜 공화국’의 자화상을 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이런 현실이 더 고착화하기 전에 ‘공짜 풍토’에서 하루빨리 탈피해야 할 것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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