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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맑을 때 물러나세요"
2015.08.03
10대 재벌 중 7개 그룹이 후계 과정에서 골육상쟁을 벌였거나 벌이고 있는 가운데 롯데그룹의 왕자의 난이 점입가경입니다. 우리나라 재벌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골육상쟁을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게 LG그룹의 구자경 명예회장(90)입니다.1995년 2월22일 그의 나이 70세 때 럭키금성 그룹의 주주총회를 앞두고 그는 회장 직을 내놓았습니다. 구 회장과 더불어 럭키금성 그룹을 키워온 허준구 구평회 구두회 허신구(모두 작고) 등 계열사 경영진이던 구-허씨 집안 창업세대들이 동반 퇴진하고 회장을 구자경의 장남 구본무에게 넘겼습니다.창업자 구인회 회장이 작고한 1969년 12월 31일 고인의 동생인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작고)은 창업자의 유지인 장자승계 원칙을 받들어 구자경 부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한 후 자신도 은퇴했습니다.26년 뒤 같은 전통이 생존한 회장에 의해 재현된 셈입니다. 구 명예회장은 평소 70세 되면 은퇴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상체가 무거워져 현장을 다니기 불편하다”는 것이 퇴임의 변이었으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했음은 요즘 그의 건강 상태가 말해주고 있습니다.그의 퇴임은 LG그룹의 구-허씨 간의 57년 간에 걸친 동업체제가 LG GS로 분리되는 2005년의 재산 가르기 과정에서 더욱 큰 빛을 발했습니다. 형제 간도 아닌 사돈 간의 재산 나누기인데다, 구씨가 경영을 맡고, 허씨가 자본을 대서 성장한 그룹이었기에 재산 분할 비율을 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자칫하면 큰 분란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이때 구 명예회장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허씨 쪽의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씨 쪽이 전자 화학 통신을, 허씨 쪽이 에너지 유통 건설을 차지했습니다. 허씨 쪽의 사업은 유동성 확보에 유리한 알짜배기 현찰장사 분야여서 구씨 쪽에서 주어선 안 된다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이때 이를 잠재운 것이 “달라는 것을 안 주면 싸움밖에 더 하나?”라는 구 명예회장의 일갈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뇌리에는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진 말라”는 창업자의 유지도 떠올랐을 것입니다.롯데 그룹의 왕자의 난에서 93세의 신격호 총괄 회장의 건강 상태에 대해 장자인 신동주 전 부회장은 ‘이상 없다’, 차남인 신동빈 회장은 ‘이상 있다’로 엇갈립니다. 신동빈 회장은 그런 이유로 아버지를 총괄 회장 직에서 해임하고, 명예 회장으로 위촉했습니다.신격호 총괄 회장이 맑은 정신이라면 차남의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총에서 두 아들이 지분싸움을 할 예정이라는데 장남의 손을 들어주고도 남을 사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장남은 그런 내용의 아버지 육성 녹음을 언론에 흘렸습니다. 2일에는 차남을 회장으로 임명한 적이 없다는 언듯 이해가 안 가는 녹음도 공개됐습니다. 그러나 회장인 차남 몰래 장남과 일본으로 가서 해임지시서 형식으로 차남을 해임한 것은 평소 불같은 성격의 그답지 않습니다. 평소의 그였다면 두 아들을 불러 놓고 대갈일성을 하든지, 이사회 소집을 명령했을 것입니다. 2000년 5월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도 정주영 명예회장(작고)이 정신이 혼미할 때까지 경영권을 쥐고 있다가 가신들에게 휘둘려 초래된 것이었습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두 아들인 정몽구 정몽헌(작고) 회장 간의 경영권 다툼에 가신 그룹들이 편을 갈라 대리전을 치렀습니다.양측은 판단력이 흐려진 명예회장을 이용해 인사를 농단함으로써 현대그룹을 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타계함으로써 내분은 자연스럽게 정몽구 회장으로 수렴됐으나 당시 한국 최대 재벌의 부끄러운 민낯을 세계에 드러냈습니다. 재벌들이 재산을 놓고 벌이는 골육상쟁은 돈 앞에서 부모 자식 간도, 형제 간도 없다는 비정함을 보여줍니다. 재산 문제는 오너 경영인이 분명한 원칙과 의지로 분배를 하지 않으면 골육상쟁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을 신물이 나도록 보았음에도 모든 재벌들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 주려고만 하지, 싸우지 않게 하는 데는 관심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기업가든 정치인이든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새겨야 할 말입니다. 신격호 정주영과 같은 기업인은 카리스마와 자신감과 건강을 겸비한 경영인들입니다. 그런 스타일의 경영인일수록 물러날 때를 놓치기 쉽습니다. 오너 경영인에게 ‘박수 칠 때 떠나라’고 하면 코웃음을 치겠기에, 나지막하게 ‘정신 맑을 때 물러나세요’라고 해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필자는 1970년 중앙대 신문학과를 나왔으며 한국일보사와 자매지 서울경제의 여러 부서에서 기자와 데스크를 거쳤고, 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을 지냈습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 위원 및 감사를 지냈고, 일요신문 일요칼럼의 필자입니다. 필명인 드라이 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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