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 국민’, ‘국립 국민’이 존재하는 현실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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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 국민’, ‘국립 국민’이 존재하는 현실

2015.07.31


몇 년 전 일본 학자들과 한국의 사립대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국에는 왜 그리 사립대학교가 많으냐?”라는 다소 부정적 톤이 깔린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필자는 한반도에서 서양식 교육 제도를 도입한 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1885년 연세대학교와 1886년 이화여자대학교를 설립한 데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인이 최초로 세운 사립대학교는 1905년의 고려대학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아울러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특히 1960~1980년대의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사립대학교를 설립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국운이 쇠퇴할 당시 국내의 뜻있는 분들이 나라를 다시 살리는 길은 교육에 있다는 신념으로 사재를 들여 중학교를 설립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배재중학교(1885), 양정중학교(1905), 보성중학교(1906), 중앙중학교(1908) 등 많은 사립 교육기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필자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우리 힘으로 교육기관을 세웠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이화여자중학교(1886), 배화여자중학교(1898), 숙명여자중학교(1906), 진명여자중학교(1906), 동덕여자중학교(1910) 등 여성 교육에 앞장선 사립학교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필자는 삼성그룹이 성균관대학교, 현대그룹이 울산대학교, LG그룹이 연암공업대학, 대우그룹이 아주대학교, 한진그룹이 인하대학교 등의 재단을 맡아 운영하는 등 대학 교육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기업들이 대학교와 대학병원을 운영하는 데는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한 일본 교수가 자문하듯 입을 열었습니다. “왜 일본에는 소니 대학교, 히타치 대학교가 없을까요?”

부러워하는 듯한 일본 교수의 말에 필자는 약간 민망했습니다. 오늘날 사학 재단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이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사학 교육기관 및 각종 사립 재단이 운영하는 박물관, 미술관, 오페라단, 발레단, 교향악단 등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언젠가부터 사립 기관을 너무나 홀대한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립 기관은 국가가 보호하고 육성해야 할 대상이지 견제 또는 차별해야 할 대상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 사례 중 하나를 정부 정책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2006년 즈음 정부는 국민의 암(癌) 질환 관리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각 지자체 중심의 암센터를 육성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즉 정부 프로젝트로 병원의 재정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천 지역의 대학병원(인하대, 가천대)들은 경쟁적으로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부정적이었습니다. 물론 정부 지원금은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인천 지역의 대학병원이 탈락한 이유가 너무도 황당했습니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에 따르면 “인천 지역에는 국립 대학병원이 없기 때문에” 탈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250만 명이 넘는 인천 지역 주민은 ‘사립(私立) 국민, 사립 환자’란 말일까요?

이와 관련해 필자가 1970년대 초 독일 대학병원에서 재직할 때의 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일연방정부에서 내수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로 각 대학병원에 오래된 의료 기기를 교체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지원해주겠다는 통지문이 왔습니다. 주임교수가 주관하는 회의에서 구입 기기 선정에 따른 업무 절차에 대해 논의하던 중 필자는 그 정부 지원 프로젝트가 독일 전국(당시 서독) 병원을 대상으로 실시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필자는 선임 교수에게 “대학병원과 그 밖에 군소 병원이 있는데, 어떤 비율로 정부 지원금을 분배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명료했습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대학마다 규모가 다르고 종교 기관이 운영하는 병원,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병원의 규모가 각기 다르기에 각 의료 기관의 진료 환자 실적을 재정 지원의 근거로 삼는다네.” 이를테면 국립 기관과 사립 기관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게 요점이었습니다. 하긴 국가 차원에서 볼 때 환자가 국공립 병원에서 진료를 받든 사립 의료 기관에서 진료를 받든 모두 국가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한때 의사 인력 수급에 문제가 생기자 연방정부는 각 의과대학에 의사 양성을 독려하기 위해 배출한 의대생 수에 따라 일정 액수의 지원금을 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주립대학교와 사립대학교에 대한 차별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네 현실은 다릅니다. 문화·예술 사업 주체가 국공립인지 사립인지에 따라 국가 지원금 액수가 크게 다릅니다. 마치 ‘국립 학생, 국립 국민’이 있고 ‘사립 학생, 사립 국민’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분명 비논리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입니다.

이처럼 ‘사립 국민’, ‘국립 국민’이 존재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발전에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반드시 고쳐야 할 문제입니다. 이에 정부 정책 책임자는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사립 기관의 뚜렷한 역할과 업적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회가 가능했다는 사실부터 마음에 새겼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봅니다.

(대화 내용을 근간으로 한 글이라 대화 내용에 첨삭이 있음을 밝혀둡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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