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와 씨 없는 수박 이야기 [방재욱]

www.freecolumn.co.kr

우장춘 박사와 씨 없는 수박 이야기

2015.07.28


오는 8월 10일은 ‘씨 없는 수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장춘 박사 서거 56주기 날입니다. 우 박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해방 후 가난으로 굶주리던 시절 작물 품종의 개량을 통해 희망의 씨앗에 싹을 틔워 준 시대적 영웅입니다. 그러나 우 박사의 삶과 그의 업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 박사가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씨 없는 수박’이 아니라 1936년 5월에 도쿄(東京)제국대학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U's Triangle(우장춘 박사의 삼각형)’을 통해 발표한 ‘종(種)의 합성(合成)‘ 이론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일부 수정케 한 종의 합성 이론은 전 세계 육종학 교재에 인용되고 있습니다. 본 칼럼에서는 우 박사의 삶을 이야기하고, U's Triangle은 다음 칼럼에서 소개하겠습니다. 

우 박사는 1898년 4월 9일에 일본 도쿄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불리는 을미사변(乙未事變)에 가담 후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 우범선(禹範善)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仲) 여사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우 박사는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게 지냈습니다. 여섯 살 때인 1903년에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우 박사 가족은 조선인들에게는 역적으로, 그리고 일본인들에게는 하류 ‘조센징’으로 대우를 받으며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어머니 혼자 감당하게 된 가정의 경제적 빈곤으로 우 박사는 한때 고아원에 맡겨지기도 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나아진 다음 어머니는 우 박사를 고아원에서 다시 데려와 가르치며 항상 조선인임을 강조하며 키웠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후원으로 우 박사는 1916년에 히로시마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인들이 동경하는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實科)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우 박사는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고원(雇員)으로 취직해 1937년 퇴직할 때까지 18년간을 육종학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재직 시절인 1930년에 겹꽃이 피는 겹페튜니아의 육종 합성에 성공하였습니다. 1936년에는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U's Triangle’을 통해 ‘종의 합성‘ 이론을 발표하며 일약 세계적으로 저명한 육종학자의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농림성 농사시험장을 그만둔 우 박사는 교토(京都)에 있는 다키이(瀧井) 종묘회사의 연구농장장으로 자리를 옮겨 연구에 몰두하다가 1945년 조국이 해방되며 환국할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 농업은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해방 전에 작물 종자의 대부분을 일본의 종자회사들에 의존해 왔던 우리 농업이 일본의 패망으로 더 이상 일본 종자회사들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종자를 구입할 만한 외환도 비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1947년 우리 정부는 종자 산업의 육성을 위해 ‘우장춘 박사 환국촉진위원회’를 만들어 당시 육종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우 박사의 환국 운동을 벌였습니다. 당시 환국촉진위원회에서는 우 박사의 환국 후 일본에 남아 있을 가족의 생활비를 위해 1백만 엔을 모금하여 보냈습니다. 그러나 우 박사는 이 돈을 가족의 생활비로 쓰지 않고 각종 작물의 종자와 실험 도구 및 육종에 관한 서적을 구입해 환국하였다고 합니다.  

1950년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일본에서 환국한 우 박사는 농촌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농업시험장과 연구소를 방문하며 낙후된 농촌의 모습을 보고 작물의 품종 개발 의지를 굳혔습니다. 

우 박사가 우량 품종을 육성해 그 종자를 농민들에게 보급하려 했을 때, 농민들의 관(官)에 대한 불신으로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당시 농민들에게 “농촌지도소가 권장하지 않는 식물을 심으면 된다.”는 의식이 만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 박사가 농민들에게 개량한 종자에 대한 믿음을 심으려고 들고나온 카드가 ‘씨 없는 수박’이었습니다. 농민들에게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보여준다면 우리 육종 기술을 이용해 만든 종자를 믿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 시도가 농민들에게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지며, 우 박사가 만든 ‘씨 없는 수박’이 당시 언론에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파되며 사람들에게 우 박사가 세계 최초로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씨 없는 수박은 1943년에 이미 일본 교토(京都)대학 기하라연구소의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되어 보고되어 있었습니다. 

우 박사는 품종개량 연구를 통해 1953년에 제주도에 감귤을 개량해 재배를 장려하였습니다. 1954년에는 채소 종자가 부족한 우리 현실을 인식하고 우리나라 재래종 배추와 중국 배추의 교배를 통해 포기가 크고 속이 꽉 찬, 그리고 병해에도 강한 ‘원예1호’를 육성해 배추의 국내 자급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배추 품종개발’ 성과는 지난 6월 24일 미래창조과학부가 광복 70년을 맞이해 발표한 ‘국가연구개발 대표성과(代表成果) 70선’에 선정되었습니다. 1958년에 강원도 감자로 알려진 무병 씨감자를 개발해 식량난 해결에 기여한 것도 우 박사의 업적입니다. 

환국 후 1950년 3월 8일 부산의 원예고등학교에서 개최된 환영회에서 우 박사는 "저는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께 약속합니다."라고 하면서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밝혔다고 합니다. 

우 박사는 환국한 지 9년 5개월이 되는 1959년 8월 10일 향년 61세로 영면했습니다. 그의 환국 결심은 삶의 마지막 장을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마감하려 한 진정한 ‘선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필자소개

방재욱

양정고. 서울대 생물교육과 졸. 한국생물과학협회, 한국유전학회, 한국약용작물학회 회장 역임. 현재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과총 대전지역연합회 부회장. 대표 저서 : 수필집 ‘나와 그 사람 이야기’, ‘생명너머 삶의 이야기’, ‘생명의 이해’ 등. bangjw@cnu.ac.kr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