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배지’보다는 이름표를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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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배지’보다는 이름표를

2015.07.09


10여 년 전의 코믹한 한 장면이 가끔 떠오릅니다. 총선에서 당선된 당당한 모습의 의원들이 국회에 첫 등원하는 자리였습니다. 초선 의원들의 얼굴이 TV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카메라를 의식한 의원들의 조금은 어색한 얼굴에서 그들만의 초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카메라 렌즈가 갑자기 초선의원 중 한 의원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유인즉 그 의원의 복장이 눈에 튀는 차림이었기 때문입니다. 약간 ‘아방가르드적’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전통적인 검정색 옷차림이 아니어서 그랬을 겁니다. 국회 입성 전부터 원래 진보 성향이 강한 명사로 꽤나 명성이 자자했던 분이라 우리 사회에 팽배한 수학 방정식 같은 고정관념을 깨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여 필자는 그걸 아주 부정적으로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의원의 복장에서 문득 빛나는 어떤 물건이 크게 클로즈업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국회의원임을 만방에 알려주는 이른바 ‘금배지’였습니다. ‘금배지’와 ‘아방가르드.’ 순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배지’는 고정관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의원의 생각이 전통적인 진보 정신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슨 짝퉁 그림을 보는 것 같고 개운치 않은 검은 밑바닥을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금배지’를 ‘국회의원 당선 자격증’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 국회의원들은 항상 가슴에 자격증을 달고 다니는 셈입니다. 이는 고정관념이자 우리 정치의 한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자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사회 분위기로 볼 때 군사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전쟁터에 나갔다가 복교한 ‘상이군인 선배’를 교정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전국의 모든 학생은 하나같이 교복을 입고 교모(校帽)를 썼습니다. 게다가 교복 왼쪽 가슴 앞에는 ‘명찰[이름표. 일명 ‘개표(犬標)]’을 달아야 했습니다. 참 삭막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고 서원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름표를 붙이지 말라는 ‘하명’을 내렸습니다. 이유인즉 학생은 군인이나 경찰관이 아닌 데다 이름표를 다는 것은 당사자가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 ‘고발하시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학생이 나쁜 짓을 할 거라는 전제 아래 이름표를 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필자가 다닌 학교만 유일무이하게 ‘이름표’를 달지 않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한 선각자가 추구한 진보 정신의 표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정반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근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 모든 공직자의 앞가슴에 ‘이름표’를 달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조례를 국회에서 입법화하자는 필자의 생각이 너무 진보적인지 모르지만, 권위적이고 구태의연한 ‘금배지’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뜻은 괜찮지만 말도 안 돼.” “요즘 국회에서는 민생 법안도 서로 편 가르기 싸움하느라 묶여 있는데 그런 것에 신경이나 쓰겠어?” “국회의원이 자진해서 그런 걸 하겠어?” 이런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싶습니다만, 오늘의 정치나 사회 현실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발상을 했겠습니까.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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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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