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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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름으로

2015.06.25


지난 번 자유칼럼(2013년 6월 19일)에 ‘사진 속 얼굴’이란 글을 써서 한 문우의 사연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입대해 민간인 유격대를 이끌고 싸우다가 임진강 북단 강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 때 전사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유복녀로 태어난 문우가 성장하여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성과를 일구어낸 과정입니다. 문우인 P씨가 직접 쓴 글을 중심으로 전말기를 재구성해봅니다.

ㅡ 강화 군청에 도움을 요청해 지역에 거주하는 유격대 전우들을 수소문하여 만났다. 대원들은 죽은 전우의 딸을 기특하게 여겼다.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묻었다는 옛 전우를 만났다. 인천 시립병원에서 요양 중이던 그는 노쇠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가물가물한 기억을 헤집어 묏자리로 여겨지는 지점으로 인도했다.

애통한 마음으로  봉분 없는 묘에 술 따르고 절을 올란 후 흙을 한 줌 퍼왔다. 햇볕에 말려 창호지에 쌌다. 죄송한 마음으로 유골함에 담아 아버지의 이름을 새겼다. 그렇게라도 고향 선산 조부모님 옆에 묻어 드릴까 하고 준비해두었다. 결국 개인 힘으로는 유해를 찾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연락이 닿았다. 감식단 책임자는 숭고한 호국보훈사업인지라 마지막 한 분까지 모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며 씩씩하게 말했다. 2009년 10월, 감식단이 강화지역으로 와서 개토제(開土祭)를 지낸 후 굴토를 시작하였다. 그들도 직계 가족이 있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의지를 굳혔다. 발굴팀 장병들은 금속탐지기를 비롯한 삽, 호미, 붓 같은 장비를 메고 험한 산 현장에 도착해 굴토를 시작했고 몇 시간 후 뼈로 추정되는 개체를 수습했다. 

한편 유해발굴감식단에서는 나에게서 DNA 감식을 위한 샘플(혈액과 타액)을 채취했다. 과학적으로 유전자 감식을 하는 기술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고라고 했다.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기다리던 2011년 4월, 감식단으로부터 아버지와 나의 DNA가 일치한다는 연락이 왔다. 왈칵 가슴이 복받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수십 년간 참았던 설움이 통증으로 치밀어 올랐다. 

며칠 후 밤잠을 설치며 기다리던 내게 감식단 책임자가 확인서를 들고 찾아와 직접 전해주었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점심 대접까지도 사양하는 관계자들의 등에 대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이 감사 표시의 전부였다. 아버지의 유해는 2011년 11월, 대전 국립현충원에 모셨다.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안장식을 거행했다.

60여 년에 걸친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자랑스러움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늦었으나 이제는 외롭지 않을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공적을 기려 훈장을 받아드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전투 기록과 서류를 준비하여 국방장관님께 서훈청원서를 올렸다. 2003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행한 ‘한국전쟁유격전사’에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영웅적인 전과가 신청서에 포함되었다.

2012년 6월 27일, 1사단 사령부 연병장 단상 수여식 자리에 앉았다. 그날 아버지는 일병에서 상병으로 진급하였다. 나는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영예로운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군 지프에 승차하여 사병들의 열병식을 사열했다. 사단장은 나의 목에 훈장을 걸어주며 "훌륭한 아버지를 두셨습니다"라고 위로해 주었다. ㅡ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우리만이 일군 것이 아닌 듯합니다. 전란을 치르며 굳건하게 나라를 지켜 낸 이름 없는 순국선열과 국군용사의 피와 땀, 고귀한 희생이 배어 있는 것이니까요. 문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해발굴감식단’ 관계자와 장병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애국자가 아닌가 하는 감사한 마음도 들었답니다. 군인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고, 국가와 국민은 군인의 명예를 지켜주었으니까요.

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외국어대 독어과 졸업. KAL 프랑크푸르트 지점장 역임.
한국수필(2008, 수필) 신인상 . 시와문화(2011, 문화평론)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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