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생가에서 [임철순]

www.freecolumn.co.kr

베토벤 생가에서

2015.06.08

‘집 뒤로 흐르는 강물 소리가 한결 높아져 있었다. 비는 아침나절부터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다. 귀퉁이가 금 간 유리에, 김이 방울방울 맺혀 줄줄이 흘러내린다. 노르스름한 한낮의 밝은 빛은 스러져가고, 방안은 포근하고 어둠침침했다. 갓난아기가 요람 속에서 꿈틀거렸다.’

프랑스 소설가 로맹 롤랑(1866~1944)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장 크리스토프’의 제 1장 ‘여명’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903년에 ‘베토벤의 생애’를 완성한 그는 1904∼1912년에 이 소설을 썼습니다. 불멸의 인간상 베토벤(1770~1827)을 모델 삼아 고난과 절망을 이겨내는 영혼의 힘을 알려주면서 이상사회를 지향한 교양소설입니다. 

지난달 하순 독일 본(Bonn)의 베토벤 생가에 갔을 때 나는 로맹 롤랑을 생각했습니다. 로맹 롤랑은 “크리스토프는 결코 베토벤일 수 없으며 그에게서 베토벤의 모습을 찾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면서도 제 1장에 묘사된 크리스토프 가정의 특징 몇 가지를 베토벤의 전기와 같은 점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200여 년 전의 라인강은 지금보다 더 생가에서 가까웠을 것입니다. 베토벤은 장 크리스토프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강변을 거닐고, 풀밭에 누워 구름을 보고, 낚시를 했을 것입니다. 

맨 위층인 3층 오른쪽 끝, 작고 어둠침침한 처마방이 베토벤이 태어난 곳입니다. 그 방 앞에 베토벤의 데스 마스크와 생전의 마스크가 차례로 놓여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의 마스크는 42세 때인 1812년, 데스 마스크는 1827년 3월 26일 사망한 지 12시간 후에 본을 뜬 것입니다. 15년 차이인데 사망 후의 모습은 볼이 움푹 꺼지고 ‘호도라도 깨물어 부스러뜨릴 만했다’(로맹 롤랑의 묘사)던 턱에서는 아무 기운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묘사한 얼굴은 생전의 마스크일 것입니다. 말테는 석고점에서 이런 얼굴을 보았습니다. ‘억세게 쥐어짠 듯한, 온몸의 감각을 단단히 매듭지어 놓은 듯한 얼굴, 끊임없이 발산되어 나가려는 음악을 악착스럽게 붙들어다 다지고 다져 응결시켜 놓은 듯한 얼굴,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리만 들으라고 신이 일부러 귀를 막아버린 음악가의 얼굴.’ 이게 진정한 베토벤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정원에 놓인 그의 두상 여러 개는 비가 내린 뒤여서 그런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릴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잡음이 빚어내는 혼탁과 허망에 정신을 팔지 않도록 하려는 신의 은총이었을 것이다.…그대의 예술 덕분에 인간은 굴욕으로부터 궐기하게 되었고, 세계를 음악의 정기로 휩싸게 된 것이다.’  베토벤에게서 배울 것은 고난에 대한 투쟁과 극복 외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인식, 비루함과 굴욕으로부터 궐기할 수 있는 용기 그런 것들입니다. 200쪽도 안 되는 '베토벤의 생애'를 여러 번 읽다 보니 몇몇 문장은 저절로 외우게 됐습니다. 

베토벤 자신도 “선하고 고귀하게 행동하는 인간은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불행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다”고 썼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보고 용기를 얻으라고 했습니다. “가능한 한 착한 일을 하고 무엇보다도 자유를 존중하고 비록 왕좌 편에 서더라도 절대로 진리를 배반하지 말라”고 쓴 적도 있습니다. 음악만으로도 우리를 각성하고 궐기하게 한 베토벤은 글로도 용기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베토벤은 피아노 제자 테레제 브룬스비크로부터 ‘보기 드문 천재, 위대한 예술가, 선한 인간’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생가가 헐리게 된 것을 안 사람들이 힘과 뜻을 모아 1889년에 이곳을 베토벤 생가박물관으로 만들었습니다. 별채는 디지털박물관으로 조성돼 가상 전시회, 어린이를 위한 음악프로그램, 영상예술관 등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본채 1층의 부엌은 박물관의 역사를 알려주는 특별전시실이 됐습니다. 이와 연결된 건물 앞쪽 공간은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실입니다. 

1층 특별전시실에서는 1890년부터 2013년까지 이곳을 방문한 주요 인사들의 친필 서명을 발췌해서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방명록에는 코피 아난, 힐러리 클린턴, 인디라 간디, 달라이라마, 고르바초프, 일본 아키히토(明仁) 천황 부부,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과 같은 정치인과 지도자, 파블로 카잘스, 주제 사라마구, 아이작 스턴, 쿠르트 마주르,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클라우디오 아바도 등 예술가들의 이름이 즐비합니다. 

독일로 신혼여행을 온 태국의 공주, 네팔의 왕과 왕비, 방글라데시 외무장관 등의 이름도 보입니다. 중국 문화부장과 신화통신 사장을 역임한 주무즈(朱穆之)는 ‘高山流水 千古知音(고산유수 천고지음)’이라는 한문과 함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20여 분간 화면을 지켜보았지만 한글은 물론 한국의 주요 인사 이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곳에 오지 않는지, 와도 글을 남기지 않는지, 음악인들이 많이 다녀갔을 텐데 너무 겸손해서 그런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한글 팸플릿도 있고 한국어 오디오 해설도 들을 수 있는데 정말 이상합니다. 독일에 살고 있는 교민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융프라우와 같은 곳을 찾아가 낙서하듯 이름을 쓰곤 하지만 이런 곳에는 잘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로맹 롤랑의 흔적도 더듬고 싶었으나 분명히 다녀갔을 법한데 그의 이름도 없었습니다. 다만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 특별 전시(5월 13일~10월 4일)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음악학자 막스 웅거를 도와 베토벤 연구와 자료 수집에 진력했고, 로맹 롤랑,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등을 깊이 탐구한 전기작가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베토벤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썼습니다. “인내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모든 불행 뒤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따르는 법이라고.” 그 좋은 일이란 죽음에 의한 해방이었고, 그는 운명할 때 '희극의 종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로맹 롤랑은 이에 대해 '그것은 그의 전 생애의 비극의 종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창조해낸 장 크리스토프는 임종 때 “언젠가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많은 새로운 투쟁을 위해”라고 말합니다. 

로맹 롤랑에 의하면 베토벤이 숨진 날은 3월 하순인데도 거센 바람 속에 눈보라가 휘날리고 우레가 요란하게 천지를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을 감겨준 것은 아무 인연도 없는 젊은 음악가였습니다. 유품은 경매에 부쳐져 헐값에 팔렸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의 생가를 찾고, 그의 음악을 통해 용기와 고난 극복의 의지를 얻는 것은 베토벤을 늘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의 생애는 그 자신이 말한 대로 '괴로움을 넘어 환희로!'(Durch Leiden Freude!)였습니다. “내가 헤매던 청년시대의 위기에 내 가슴속에 영원한 삶의 불을 붙여준 것은 베토벤의 음악이었다”는 로맹 롤랑의 말을 생각하며 그 집을 나왔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그리드형

댓글()